인물 요약
고려 전기에, 동지추밀원사, 지추밀원사, 한림학사승지 등을 역임한 문신.
탄생 정보
양력 생년월일이 확인되지 않아 날짜 상징은 계산하지 않습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머리말
고려 문종(文宗)~예종(睿宗) 시대에 주로 활동한 문신으로 숙종(肅宗)과 예종의 측근으로 중용되었다. 여진 정벌의 화려한 성과로 정벌 직후 큰 영광을 누렸으나, 상황이 악화되고 결국 9성 지역을 여진에게 돌려주게 되면서 문책을 당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출사와 관료로서의 활동
윤관은 1073년(문종 27) 10월에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갔다. 이후 그는 각종 정치적 현안 및 외교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였고, 지공거(知貢擧)를 역임하는 등 학식을 발휘할 기회도 누렸다. 기록의 편중으로 인하여 보통 윤관에 대해 여진 정벌을 위주로 논하게 되지만, 우선 관료로서의 그의 활동에 대해 먼저 살펴보자. 기록상 확인되는 윤관의 최초 관력은 문종[고려](文宗) 때에 습유(拾遺)와 보궐(補闕)을 역임했다는 것이다. 두 관직 모두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에 속한 간관(諫官)의 역할을 담당하는 자리였다. 1101년(숙종 6)에 윤관은 추밀원지주사(樞密院知奏事)에 임명되었고, 이듬해에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를, 1103년(숙종 8)에는 이부상서동지추밀원사(吏部尙書同知樞密院事)를 거쳐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에 올랐다. 더구나 이 무렵 관료의 인사를 담당하는 이부상서를 겸직했고, 1102년에는 관료를 감찰하는 어사대부(御史大夫)도 역임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여진 정벌과 윤관의 영광, 그리고 굴욕
12세기 초반의 ‘윤관의 여진 정벌과 9성 축조’는 한국사에서 큰 사건 중 하나이며, 이 시기에 벌어졌던 동북아시아 국제 질서의 변동을 보여주는 하나의 지표가 된다. 윤관 개인에게도 그의 일생을 뒤흔든 대사건이었다. 그렇다면 이 사건이 벌어질 무렵의 국제 정세를 살펴보고, 동시에 ‘여진’이 어떤 세력인지부터 알아보는 것이 전체적인 상황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10세기부터 11세기까지 동북아시아의 주요 국가는 대륙 북방 초원의 거란, 대륙의 송, 그리고 한반도의 고려라 할 수 있다. 10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이들 국가들 간에는 큰 마찰이 발생하였다. 이러한 구도는 11세기 말부터 여진족이 성장하면서 근본적으로 흔들리게 되었다. 여진족은 한반도 중북부와 만주 일대에 부족별로 흩어져 살고 있었고, 이 시기에는 부족마다 상황에 따라 고려 혹은 거란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가고 있었다. 압도적인 병력과 계획된 작전을 앞세운 고려군은 여진족 부락들을 각개 격파하며 급속도로 전진했다. 일부 지역에서 여진족의 저항을 맞닥뜨리거나 기습을 받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나, 맹장 척준경(拓俊京) 등의 활약이 곁들여진 고려군은 결국 여진족을 대파하며 큰 성과를 거두었다. 그리고 추충좌리평융척지진국공신·문하시중·판상서이부사·지군국중사(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門下侍中·判尙書吏部事·知軍國重事)에 임명되고 다시 영평현개국백(鈴平縣開國伯) 식읍(食邑) 2천 5백호 식실봉(食實封) 3백호에 봉해졌다. 사실 윤관은 개선하여 승전을 보고했으나, 이미 1108년(예종 3) 초반부터 고려군은 완안부가 파견한 군대 및 현지 여진족의 반격으로 큰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고려군은 여러 성에 분산된 채 여진족에 의해 포위공격을 당하였고, 피해가 누적되고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