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의 제7대(재위: 1455년~1468년) 왕.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말라가 Malaga
페일 크림 ペールクリーム, Pale Cream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조선의 일곱 번째 왕
세조(世祖)는 조선의 일곱 번째 왕이다. 1455년부터 1468년까지 14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조선 전기의 각종 제도들을 정비하였다. 그러나 세조가 왕이 된 과정에서 계유정난(癸酉靖難)이라는 무력적인 수단으로 정권을 잡고 단종[조선](端宗)의 왕위를 찬탈 하였다는 사실은 후대에 지속적인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또한 이 과정에서 측근들을 중심으로 과도하게 공신(功臣)을 양산하여 정치적으로 좋지 않은 선례를 남겼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호방한 기상으로 세상을 놀라게 하다.
세조는 1417년(태종 17) 당시 충녕대군(忠寧大君)이었던 세종(世宗)과 소헌왕후(昭憲王后) 사이에서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 이름은 유, 자는 수지이다. 1428년(세종 10)에 처음 진평대군으로 봉해졌다가, 후에 함평대군으로, 또 진양대군으로, 다시 또 수양대군으로 재차 봉해졌다. 대부분의 역사 기록에서는 가장 마지막으로 받은 봉호인 수양대군으로 왕위에 오르기 전의 세조를 기록하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수양대군, 정치의 전면에 나서다.
수양대군은 부왕인 세종을 도와서 불교서적을 번역하고 간행하는 일, 악보를 정리하는 일 등을 하였으며, 형인 문종은 그에게 《병요(兵要)》와 《무경(武經)》을 주해하고 《음양서(陰陽書)》를 바로 잡는 일을 부탁하였던 만큼 수양대군은 무예를 비롯한 음악, 불교, 어학 등의 다방면에서 깊은 조예를 보였다. 그러나 문종이 왕위에 있을 때만 해도 수양대군의 대외적 활동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간간히 여진족의 귀화정책이나 병법에 대해 문종이 그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수양대군이 세종의 명복을 빌기 위해 대자암 중창을 건의한 정도를 제외하고는 별다른 활동이 없었다. 수양대군이 본격적으로 조정의 일에 간여하며 소위 정치를 시작한 것은 1452년(문종 2) 5월 문종이 38세의 젊은 나이로 승하하고, 그 뒤를 이어 단종이 12살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르면서부터이다. 수양대군은 단종이 즉위한 해 7월에 홍윤성(洪允成), 한명회(韓明澮), 권람(權擥), 홍달손(洪達孫), 양정(楊汀) 등의 핵심 세력을 규합하고 이후 안평대군과의 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 하였다. 단종이 직접 즉위교서에 “내가 어리고 정사에 어두우므로 모든 사안을 의정부, 6조와 상의하겠다.”라고 밝히고 6조의 사무를 의정부에 보고하도록 한 것은 의정부의 권한을 크게 증대시켰다. 이어서 수양대군에게 협조하였던 정인지(鄭麟趾), 한확(韓確), 정창손(鄭昌孫) ,박종우(朴從愚) 등과 휘하에 있던 권람, 한명회, 홍윤성, 홍달손 등을 정난공신(靖難功臣)으로 책봉함과 동시에 관직과 막대한 노비, 토지를 수여하였다. 특이한 것은 정난공신에 성삼문(成三問), 신숙주(申叔舟) 등의 집현전 학사 출신들이 대거 포함되었다는 사실인데, 이는 수양대군 세력이 그동안 의정부 중심의 행정체제 속에서 관료조직 내에 쌓인 불만을 해결하면서 사대부들의 신망을 얻으려고 한 시도로 파악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왕이 된 수양대군, 세조 시대의 빛과 그늘
1455년(세조 1) 윤6월 11일 수양대군은 단종이 양위하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이는 수양대군의 정치적 행보를 저지하려던 금성대군과 세종의 후궁이자 단종을 어릴 때부터 돌보았던 혜빈 양씨(惠嬪楊氏)를 유배 보내자고 중신들이 건의하는 자리에서 단종이 결단한 것으로, 사실상 단종에게는 강요된 양위였고 찬탈이었다. 세조 왕위의 도덕적 명분 부재와 정통성의 하자는 세조 재위 기간 동안 그늘처럼 따라다니는 부담이었다. 세조 조반에는 그의 즉위에 반대하는 여러 세력들의 저항과 이를 처단하는 세조의 대응이 반복되었다. 세조는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을 거치면서 친동생들과 조카를 죽이고, 자신에게 반대하였던 관료들과 그들의 식솔을 대량 살육하였다는 비난을 피할 수 없었다. 이렇게 양산된 수많은 공신들은 조선 중기 대토지를 소유하며 특권적인 관직 독점을 꾀하였던 한명회 등 훈구세력의 시작이 되었다는 점에서 부정적이다. 또한 세조는 공신들과 잦은 술자리와 사냥, 군사훈련을 통해 일종의 단합대회를 하였는데, 이것이 지나쳐 군신간에 실수가 나오기도 하였다. 또한 세조는 세종 대부터 행해지던 의정부서사제를 폐지하고 육조직계제를 강행했는데, 이는 의정부서사제의 폐지를 반대했던 하위지에게 “내가 어려서 서무를 재결할 수 없다고 생각하여 대권을 아래로 옮겨보겠다는 것이냐.”라고 말했던 세조의 권력 강화 의도를 보여주는 일이었다. 세조는 문종과 단종의 짧은 치세를 거치는 동안 지속되었던 정치적 격변기 속에서 소홀히 할 수 밖에 없었던 국정의 여러 사무들을 추스르려 하였다. 세조는 이 해 4월 지방의 관찰사들에게 유서를 내려 군적을 기록하여 보고하게 하고, 이틀 뒤에 호패법의 시행을 명하였다. 세조는 통치의 기준을 제공하는 법전의 편찬을 시작하였다. 즉위 초에 세조는 최항 등에 명하여 육전상정소를 설치하고 육전(六典)을 수찬하게 하고 이에 대하여 틈틈이 보고를 받으며 친히 필삭하기도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세조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세조는 말년에 지병으로 고생하다가 1468년(세조 14) 9월 7일에는 병세가 위급해지자 서둘러 세자에게 전위하였다. 그리고 이틀 뒤 수강궁에서 승하하였다. 세조는 왕비 정희왕후(貞熹王后)와의 사이에 2남 1녀를 두었다. 큰 아들은 스무 살의 젊은 나이로 죽은 의경세자로, 후에 아들인 성종에 의해 덕종[조선](德宗)으로 추존되었다. 작은 아들은 예종으로 그 역시 왕위에 오른 지 1년 만에 스무 살의 나이로 승하하였다. 불행했던 세조의 개인사만큼 그에 대한 후대의 평가 또한 조선시대 내내 엇갈렸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