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조광조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조광조

趙光祖
조선 전기문신유학자
시대조선 전기
직군문신 · 유학자
양력 생일1482년 10월 1일
향년37세
Birth Color
퍼플 헤더 (Purple Heather)
#B9B7D4
Second Color
황단 (黄丹)
#EE7948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8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8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 전기에, 교리, 부제학, 대사헌 등을 역임한 문신.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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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unar

음력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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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 생일8월 10일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천칭자리
별자리 주간천칭자리Ⅰ: 완벽주의자의 주간
탄생성금성
탄생신아프로디테
Terrestrial

땅

탄생화빨강 국화
꽃말깊은 사랑 · 붉은 위로 · 품위 있는 진심 · 시월의 시작
탄생목개암나무
탄생석오팔
Spirit

그 외

탄생주실버 피즈
탄생색 (영문판)퍼플 헤더 (Purple Heather)
탄생색 (일어판)황단 (黄丹)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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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개요

조광조(趙光祖)의 자는 효직(孝直)이고, 스스로 호를 정암(靜菴)이라 하였다. 그는 김굉필(金宏弼)의 제자로서 조선 성리학의 정통을 이었으며, 중종반정(中宗反正) 이후 연산군(燕山君) 때의 잘못된 정치를 바로잡고 유교적 이상 정치를 실현할 적임자로 사림 세력에 의해 추대되었다. 중종 10년(1515) 과거 급제 이후 중종[조선](中宗)에 의해 개혁 정치 추진의 중심인물로 발탁되어, 짧은 기간 동안 승진을 거듭하면서 개혁 정책의 추진을 주도하였다. 하지만 사림 세력의 급진적인 개혁 추진은 국왕과 공신 세력의 반발을 사게 되었고, 중종 14년(1519) 기묘사화(己卯士禍)가 일어나자 조광조는 유배되었다가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후 조선의 정치는 몇 차례 우여곡절을 겪은 뒤에 결국 사림 세력이 주도하게 되었고 그에 따라 조광조는 성리학적 이념에 충실한 개혁 정치가요 조선 도학의 정통으로 추숭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가계와 학문적 연원

조광조의 고조는 조온(趙溫)인데, 조선의 개국공신(開國功臣)으로 한천부원군(漢川府院君)으로 책봉되었으며, 시호는 양절(良節)이었다. 증조는 조육(趙育)으로 의영고 사(義盈庫使)를 지냈고, 조부는 조충손(趙衷孫)으로 성균관 사예(成均館司藝)를 지냈다. 조광조의 아버지는 조원강(趙元綱)으로 벼슬이 사헌부 감찰(司憲府監察)에 이르렀고, 뒤에 이조참판(吏曹參判)으로 증직되었다. 어머니는 여흥 민씨(驪興閔氏)로 현감(縣監) 권의(權誼)의 따님이다. 이처럼 조광조는 여러 대에 걸쳐 벼슬을 지낸 당시의 대표적인 양반 가문 출신이었다. 조광조의 가계(家系)에 대해서는 그의 문집에 포함되어 있는 ‘정암선생세계지도(靜菴先生世系之圖)를 참고할 수 있다. 이 도표에는 조광조의 10대조로부터 후손들에까지 직계의 가계도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조광조는 성종 13년(1482) 8월 10일에 태어났다. 조광조의 생애에 대한 기록으로는 여러 가지가 있다. 당시 조광조는 성리학의 가르침을 열심히 배우고 가르쳤으며, 그에 따라 자신의 일상적 삶을 살아가는 실천을 중시하였다. 그 기록에 부가되어 있는 사론을 보면, 생원 김식(金湜)과 조광조 등이 김굉필의 학문을 이어받아 언행을 함부로 하지 않고, 관대를 벗지 않으며, 종일토록 단정하게 앉아서 마치 손님을 대하는 것처럼 하여 본받는 이들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관직 진출과 개혁 정치 추진

중종 10년(1515) 여름에 조광조는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조지서(造紙署) 사지(司紙)에 제수되었고, 이해 가을에 실시한 알성시(謁聖試)에 응시하여 을과에 수석으로 급제하여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이 되었다. 얼마 뒤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으로 옮겼다. 조광조의 문집에는 그가 알성시에 급제할 때의 책제와 그 답안인 대책문이 남아 있다. 과거의 문제는 요순시대의 이상 정치를 현실에 구현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하는 것이었는데, 이에 대해 조광조는 먼저 공자의 가르침이 사회의 명백한 목표가 되어야 함을 전제한 다음, 정치의 근본을 바르게 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정치의 근본은 올바른 도리에 근본을 두고 정성스러운 마음으로 정치를 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박상과 김정이 유배되자 당시 과거 급제 후 막 관직에 진출하여 사간원정원으로 있던 조광조는 상소를 올려 구언 상소를 올린 이들을 처벌하자고 주장한 대간은 본분을 상실하였으므로 모두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사간원의 하급 관료인 정언에 지나지 않는 조광조가 자신이 속한 사간원과 사헌부 관원 전원을 파직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던 것이다. 이 상소를 통해 조광조는 유교 이념의 주창자로 사림 세력이 생각하는 시대적 요구를 실현할 지도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조광조는 폐비 신씨의 복위를 주장한 박상과 김정의 주장이 옳다고 옹호한 것은 아니었다. 중종은 대신들과 의논한 다음 조광조의 요청에 따라 대간의 관원을 교체하였다. 이후 조광조는 승진을 거듭하였는데, 중종 11년(1515)에는 호조·예조·공조 3조의 좌랑을 거쳤으며, 홍문관(弘文館)에 뽑혀 들어가서 수찬(修撰), 교리(校理), 응교(應敎), 전한(典翰)을 지냈다. 이처럼 조광조는 사림 세력과 중종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면서 고속 승진하였다. 이 상황에서 그는 사림 세력 사이에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던 조광조를 발탁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기묘사화와 죽음

조광조와 그의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 정책은 당시 조급하게 효과를 보고자 하여 개혁의 내용이 장황하거나 과격하다는 평을 받았다. 또한 구신(舊臣)들 중에는 이들에게서 공격을 받게 되자 원한을 갖게 되는 사람도 있었다. 조광조는 그러한 조짐을 보고 여러 차례 직위를 사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종 13년 겨울 조광조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라, 사헌부(司憲府) 대사헌(大司憲)에 제수되었다. 이때에도 조광조는 관직이 너무 빨리 오르는 것을 두려워하여 간절하게 사양하였으나, 중종은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조광조는 대사헌 직에 나왔으며, 사림 세력이 추진하는 개혁도 급속하게 진행되었다. 조광조는 대사헌에 제수되자 스스로 과거 급제 후 40개월도 되기 전에 종2품의 대사헌이 되는 것은 너무 외람된 일이라고 하며 사퇴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중종은 행정과 법률과 같은 일은 말단에 지나지 않으므로 경력이 없어도 할 수 있으며, 대사헌과 같은 중요한 자리에 조광조 이외의 적임자가 없다고 하며 그의 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조광조는 이날 하루 동안 다섯 차례나 사직하겠다고 요청하였으나 중종은 윤허하지 않았다. 이때 조광조는 사헌부 대사헌으로서 이러한 논의를 주도하는 위치에 있었다. 하지만 이러한 논의는 지금까지 조광조 세력의 개혁 추진 과정에서 소외되어 자신들의 이해관계를 침해받게 되었다고 생각한 정국공신들의 본격적인 반발을 불러오게 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반발이 결국 기묘사화라는 정치적 파탄을 몰고 왔다. 조광조는 정국공신 중에 연산군 때의 총신들이 많으며 그들은 반정 때 특별한 공을 세우지도 않았으면서 공신에 참여한 경우가 많았다고 주장하였다. 공신 개정 논의는 결국 기묘사화의 직접적인 계기가 되어 조광조의 죽음을 불러오게 되었다. 중종 14년 11월 15일 밤에 임금은 병조판서 이장곤(李長坤) 등을 부른 다음 의금부에 투옥해야 할 대상을 가진 명단을 내렸는데, 거기에는 조광조와 그의 추종자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학문 세계

성리학은 이미 고려 말에 전래되어 학자들에게 알려졌으나, 절의와 사장을 넘어 전적으로 성리학 이론에 의지하여 그것을 실천하려는 태도를 보이는 것은 성종[조선](成宗) 때 김종직의 문인들로부터 시작된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한훤당 김굉필이 그 정통을 이었다고 평가된다. 조광조는 김굉필을 스승으로 섬겼다. 하지만 김굉필과 조광조 모두 험난한 세상에서 안온하게 학문과 저술에 매진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기 때문에 두 사람의 학문적 성향을 엿볼 수 있는 저술을 풍부하게 남길 수는 없었다. 조광조의 학문적 성향은 주로 지치(至治)로 설명되어 왔다. 조광조는 다스림의 근본인 임금의 마음이 바르지 않으면 정치의 주체가 의지하여 설 수 없고 교화가 행해질 수 없다고 보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추숭과 문묘 종사

중종 말년 김안로(金安老)가 실각하자 여론이 조광조의 누명을 벗겨주고자 하였으며 중종도 은택을 내릴 뜻이 있었다. 이어서 인종[조선](仁宗)이 즉위하자 묘당(廟堂)의 거듭된 논의와 유생의 호소로 말미암아 마침내 조광조의 관작을 예전처럼 회복하라는 명령이 내렸다. 인종이 내린 조광조의 복관 명령은 그의 유언이었다. 인종은 죽기 하루 전에 조광조의 복권을 명령하였다. 그는 조광조를 복권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나 부왕인 중종이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에 쉽게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다고 하였다. 병이 깊어 죽음이 닥치자 유언의 형태로 조광조를 복권하고 현랑과를 회복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리하여 선조 원년(1568)에 조광조는 영의정으로 증직되었으며, 이듬해에는 문정(文正)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한편 기묘사화를 일으킨 원흉으로 지목되어 오던 남곤은 이때에 이르러 관작이 삭탈되었다. 선조는 신료들의 조광조 추숭 요청에 대해, 즉위 초에 국시(國是)를 정하고 선비의 풍습을 바르게 하는 일의 일환으로 이를 수락하였다. 기묘사화를 일으켜 조광조를 죽게 한 원흉이라고 지목되던 남곤은 선조 원년 9월 23일 관작을 삭탈 당하는 처분을 받았다. 『선조실록』에는 이보다 이틀 앞선 날짜 부분에 남곤이 조광조를 모해한 전말이 수록되어 있다. 광해군 2년 9월 5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을 문묘에 종사하라는 교서가 내렸다. 동방의 현인으로는 설총(薛聰), 최치원(崔致遠), 안향(安珦), 정몽주가 모셔져 있었는데, 이때에 이르러 5현이 한꺼번에 종사되었으며, 거기에 조광조도 포함되어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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