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시대 정읍현감, 진도군수, 전라좌도수군절도사, 삼도수군통제사 등을 역임한 무신.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노스 씨 North Sea
터콰이즈 그린 ターコイズグリーン, Turquoise Green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이순신의 생애
1545(인종 1)∼1598(선조 31). 조선의 무신이다. 무신으로 등용된 초기에는 북방 오랑캐를 방어하는 데 활약하였고, 일찍부터 장수로서 능력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원칙과 소신이 분명한 성격으로 인해 그를 질시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다. 임진왜란 직전 우수한 장수로 특별히 발탁되어 전라좌수영에서 수군을 기르며 전쟁가능성에 대비했다. 전쟁이 발발하자 탁월한 전략, 전술적 능력을 발휘하여 연전연승했다. 이는 꾸준한 준비와 상황에 맞는 적절한 대응책 덕분이기도 했다. 그의 승리 덕분에 조선은 나라를 보전할 수 있었다. 그러나 빛나는 전공은 그를 질시하는 세력의 견제를 불러왔고, 이로 인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노량해전에서 퇴각을 꾀하던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가 전사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임진왜란 초기 해전에서의 승리
1592년 4월15일 술시에 경상우수사 원균으로부터 이순신에게 연락이 왔다. 4월13일 신시(申時)에 일본군의 무수한 함선이 부산을 침략했다는 소식이었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이 이끄는 경상좌수영은 이미 무너진 상태였다. 이순신은 이미 침략에 대비한 준비를 착실히 해왔으나 섣불리 출진하기보다는 전황을 지켜보는 동시에 승리를 위한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출전하는 쪽을 택했다. 5월4일 마침내 이순신이 지휘하는 전라좌수영 수군의 첫 번째 출진이 이루어졌고, 한산도에 이르러 경상우수사 원균과 합류했다. 5월7일 옥포 앞바다에서 첫 번째 해전이 이루어졌고 승리했다. 첫 번째 해전인 옥포해전이었다. 이들은 이순신의 함대를 보고 배에 올라타 그 중 6척이 조선수군에 덤벼들어 전투가 벌어졌다. 그러나 일본군함은 곧 이순신의 함대에 격파되었다. 이순신의 함대는 일본의 대선13척, 중선6척, 소선2척을 격파하는 전과를 올렸다. 마침 밀물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 안으로 진입할 수 있었고 거북선이 처음 전투에 투입되어 활약했다. 이 전투에서 이순신을 비롯하여 나대용 등이 부상을 입었는데, 나대용은 탄환에 맞았고 이순신 역시 왼쪽 어깨에 탄환이 관통하였다. 전라우수사 이억기(李億祺)와 합세한 이순신은 일본군 함대를 추격하여 격파하였다. 전투결과가 조정에 전해지자 조정은 이순신의 자급을 자헌대부로, 이억기를 가선대부로 올렸다. 이순신은 이억기와 연합함대를 조직하고 함께 출동한 뒤 원균의 전선 7척과도 합세했다. 이순신은 견내량의 지형이 좁아 원하는 전투에 적합하지 않다고 판단했고, 한산도를 전장으로 택했다. 일본의 수군을 공격하면서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한 뒤 학익진을 펼친 공격을 퍼부어 대부분의 적선을 격파했다. 이를 한산도 대첩이라 부른다. 한산도 대첩의 전황을 살펴보면, 출진 이후 당포에 멀던 중 목동 김천손이 와서 일본군선이 견내량에 머물고 있다는 정보를 전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강화교섭기의 활동과 억울한 파면
명과 일본이 강화교섭에 들어가면서 전쟁은 소강상태에 들어가게 되었다. 대부분의 조선인들이 더 이상의 전투가 없을 것이라며 안심하였고 장수와 병사들은 해이해졌다. 그러나 이순신은 병사들의 군기를 유지하면서 전선과 무기의 개보수에 힘썼다. 물론 이러한 작업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당시 이순신의 어려운 상황은 그의 보고에 잘 나타나 있다. …군정이 해이해지고 예리한 기세가 꺾였으며 전염병이 크게 돌고 있습니다. 게다가 양식이 부족하여 연일 굶게 되고 굶던 끝에 병이 나면 반드시 죽습니다. 군사 수는 날마다 줄어드는데 보충할 사람이 없습니다. 조선조정은 이를 반신반의하면서도 일단 실행에 옮겨보기로 하였고 이순신에게 요격을 명하였다. 그러나 신중한 성격의 이순신은 주저했다. 조정의 재촉에 마지못해 출진하였으나 이미 가토 기요마사는 상륙한 후였고 조정은 이를 빌미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이순신은 신중한 판단 하에 출진하지 않았으나 조정에서는 이순신이 지시를 따르지 않았다고 하여 비난론이 들끓었고 원균이 대체자로 부상하게 되었다. 원균은 자신이라면 잘 해낼 수 있었을 것이라며 간접적으로 이순신을 비난했다. 그리고 이순신은 결국 파면되어 한양으로 소환되는 처지에 놓였다. 선전관을 보내 이순신을 잡아오도록 하되, 원균과 교대한 후에 잡아오되 만약 적과 대치하고 있다면 전투가 끝나기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이순신은 가혹한 심문을 받았고, 아울러 죽음의 위기에 처하였다. 당시 사람들은 이순신이 실각한 이와 같은 과정을 일본군의 교묘한 반간계(이간계)로 판단하기도 했다. 요시라가 조선에 가토 기요마사의 도해 예정 사실을 이순신에게 알려주었으나 이순신이 의심하여 출진하지 않았다며 조선을 희롱했다. 조정은 이순신을 원균으로 교체하고 이순신을 국문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 후 명량해전과 노량해전
이순신의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를 이어받은 원균은 1597년 7월 칠천량에서 일본군에 대패했고 이순신이 키워온 조선수군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다. 조선조정은 다시금 이순신을 기용할 수밖에 없었다. 삼도수군통제사에 재임용된 그는 남해 등지를 두루 살폈으나 당시 조선 수군에는 남은 군사 120인이었고, 병선이 고작 12척이었다. 조정에서는 수군이 미약하여 적을 막을 수 없다고 보고 이순신에게 육지에서 싸우라고 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장계를 올려 자신이 임진년 이래 5, 6년간 적이 전라, 충청 지역으로 오지 못하게 막을 수 있었던 것은 수군으로 길을 막았기 때문이며, 지금 전선이 아직 12척 남아 있으니 죽기를 각오하고 싸우면 또 가능할 것이라고 하였다. 어려운 전투에 임하게 된 이순신은 자신을 믿고 따르는 장수와 병사들을 이끌고 8월 15일 전투에 임했다. 그리고 명량해전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하여 31척을 격파하는 거짓말 같은 전과를 올렸다. 1597년 9월16일 오전, 적선이 출진했다는 정보를 들은 이순신은 전투 준비를 마치고 전라우수영 앞바다에서 적선을 기다렸다. 적선은 이순신의 대장선을 포위하여 접전이 벌어졌다. 이순신이 독전하자 함께 돌진하였다 조류가 조선군에 유리하게 바뀌었고 31척의 적선을 파괴했다. 명량대첩으로 제해권(制海權)을 다시 찾은 그는 보화도를 거쳐 고금도로 주둔지를 옮겼다. 순천왜성(順天倭城)에 주둔 중이던 고니시 유키나가는 명나라 장수 유정과 교섭을 시도했으나 이순신은 진린과 함께 퇴각하려는 고니시 유키나가 측의 움직임을 해상에서 저지하였다. 1598년 11월 18일 이순신은 노량에서 고니시 유키나가와 그의 탈출을 돕는 일본군 수군에 공격을 가했다. 노량해전이 벌어지던 중 조명연합수군의 함선과 적선이 뒤엉켜 혼란한 상황이었다. 진린이 적선에 포위되자 이순신이 이를 보고 구해주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이순신에 대한 현창
이순신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조정에 전해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 조의를 표하고 우의정에 추증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에 녹훈되었고 덕풍부원군에 추봉되었으며,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 여수 여수 충민사(麗水忠愍祠), 충무의 통영[충무] 충렬사(忠武忠烈祠) 남해의 남해 충렬사(南海忠烈祠), 아산의 현충사(顯忠祠) 등에 제향하였는데, 이 중에 현충사의 규모가 가장 크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