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시대 공조좌랑, 한성부서윤, 사헌부지평 등을 역임한 문신. 문인.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피에스타 Fiesta
크림슨 クリムソン, Crimson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시대적 배경(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 배경 등)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조선은 후금(뒤의 청)을 배척하는 외교정책을 펼쳤다. 이에 불만을 가진 청은 1627년과 1636년에 조선을 침략하였고, 이를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이라 한다. 병자호란 이후 조선의 피해는 매우 컸다. 인조[조선](仁祖)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청 태종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였다. 그리고 소현세자(昭顯世子)·효종(孝宗), 수십만의 백성이 청에 포로로 잡혀가게 되었다. 이처럼 병자호란을 통해 굴욕적인 패배를 경험한 조선에서는 청에 대한 반발로 북벌론(北伐論)이 등장하기도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가문적 배경
윤선도의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해옹(海翁)이고, 시호는 충헌(忠憲)이다. 윤선도의 고조부는 윤효정(尹孝貞)이다. 윤효정은 무오사화(戊午士禍), 갑자사화(甲子士禍) 이후에 숨어 살며, 스스로 호를 ‘어초은자(漁樵隱者)’라 하였다. 윤효정은 윤구(尹衢)를 낳았다. 윤구는 홍문관 부교리를 지냈으며,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연루되어 화를 입었다. 윤구는 윤홍중(尹弘中)과 윤의중(尹毅中)을 낳았다. 윤홍중은 예조정랑을 지냈다. 윤의중은 좌참찬을 지냈으며, 아들 둘을 두었다. 장남은 윤유심(尹惟深)이고, 차남은 윤유기(尹惟幾)이다. 윤유기는 윤홍중에 양자로 가게 된다. 윤유기는 강원도 관찰사를 지냈고, 능성구씨 구운한(具雲翰)의 딸과 결혼하였다. 윤유심은 예빈시 부정을 지냈다. 순흥안씨 안현(安玹)의 손녀와 결혼하여, 아들 둘을 두었는데, 윤선언(尹善言)과 윤선도를 낳았다. 윤선도는 8세에 큰아버지인 윤유기에게 양자로 가게 된다. 윤선도의 외할아버지는 안현(安玹)이다. 윤선도의 장인어른은 윤돈(尹暾)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정치적 활동과 업적(과거, 관직)
1603년 진사 초시에 합격하였고, 1612년 봄에 진사시에 합격하다. 1616년 예조판서 이이첨(李爾瞻), 유희분(柳希奮), 박승종(朴承宗)의 처벌을 청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윤선도는 신하된 자가 권력을 혼자 장악하면 자신의 측근을 요직에 임명하고, 상과 벌을 자기 마음대로 행사한다고 하였다. 이어 훌륭한 임금께서 위에 계시어 임금과 신하가 각기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있으니 이러한 자가 없어야 하지만, 예조판서 이이첨의 하는 짓을 보니 불행히도 이와 가깝다고 하였다. 결국 이 상소로 인해 윤선도는 함경북도 경원(慶源)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인조반정 직후인 1623년 석방되었고, 4월에 의금부 도사가 되다, 7월에 파직되어 해남으로 돌아갔다. 1625년과 1626년에 의금부 도사와 안기 찰방이 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1638년 6월에 병자호란 때 왕을 보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경북 영덕(盈德)에 유배를 가게 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사회경제적 활동과 업적(신분 관련, 농상업 관련 등)
윤선도는 1635년 성산현감 시절에 『을해소』를 올려 갑술양전 때 감관의 중요성을 지적하며 고을을 바꾸어 농지를 측량하는 방식의 수정을 요구하였다. 1652년 윤선도는 원두표(元斗杓)를 비판하였다. 윤선도는 원두표가 재주는 많으나 덕이 적고, 이득을 좋아하고 의리가 없으며, 사납고 교할하며 포학하니 원두표를 먼 지방에서 한가히 살도록 하여 조정이 안정된 뒤에 다시 등용하기를 요청하였다. 당시는 효종이 김육(金堉), 정태화(鄭太和), 심지원(沈之源)과 함께 외척인 원두표를 정치적 기반으로 삼아 정국을 운영하고자 한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윤선도의 발언은 효종의 정국 운영 구상을 깨는 사건이었다. 1655년 윤선도는 『시폐사조소』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윤선도는 각사에서 도망친 노비를 잡는 일, 섬에서 사는 백성을 쫓아내는 일, 강화도의 어부를 쫓아내는 일, 산성을 건설하는 일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윤선도는 호패의 무용함을 강조하였다. 윤선도는 호패의 법과 같은 것은 중국에도 없는 것인데 이조에서 시행하려는 이유가 백성들을 속박하고 부려먹으려는 것이라고 하였다. 1656년 윤선도는「정전남순상단(呈全南巡相單)」에서 가난한 여자친척을 예로 들어 관찰사에게 백성에 대한 구휼과 풍속교화를 당부하였다. 1658년 윤선도는 정개청(鄭介淸)의 신원을 청하였다. 윤선도는 “지난번에 정개청의 손자 2명이 그의 할아버지를 신원하려고 천리 길을 와서 소를 품고 호소하였으나, 승정원에서 물리쳐서 끝내 주상께 전달되지 못하였다고 합니다. 이 일로 윤선도는 송시열(宋時烈)과 송준길(宋浚吉) 등의 노론과 대립하게 되었다. 정태화와 송시열은 1년을 주장하였고, 허목(許穆)과 윤휴(尹鑴)는 3년을 주장하면서 치열한 논쟁이 발생하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윤선도는 윤휴의 3년설에 동의하면서 정태화와 송시열의 주장이 효종의 정통을 부정하는 설이라고 주장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문화적 활동과 업적(출판, 저술)
1638년 경북 영덕으로 귀양을 갔다가 이듬해 풀려난 윤선도는 보길도에서 생활하면서 많은 문학작품을 남겼다. 이 때 지어진 대표적인 작품이 「어부사시사(漁父四時詞)」이다. 「어부사시사」는 40수의 단가로, 작자와 창작연대를 알 수 없는 고려후기 「어부가」를 재창작한 작품이다. 이외 윤선도는 이 시기에 「산중신곡(山中新曲)」·「산중속신곡(山中續新曲)」·「고금영(古今詠)」·「증반금(贈伴琴)」 등을 지었다. 효종대 예조참의에 임명되었다가, 서인의 모략으로 사직한 윤선도는 경기도 양주(楊州)의 고산에서 생활하였다. 이곳에서 윤선도는 자신의 마지막 작품인 「몽천요(夢天謠)」를 지었다. 이 책에는 한시문이 실려 있고, 별집에는 한시문과 시조(35편), 「어부사시사」가 실려 있다. 윤선도는 정철·박인로와 함께 조선시대 3대 가인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기타 업적과 말년
1636년 병자호란이 발생하자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등 왕실사람들과 신하들이 강화도(江華島)에 피난을 가 있었다. 이를 돕기 위해 윤선도는 남자 종을 배에 태워 강화로 떠났으나, 이미 함락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다시 남한산성으로 향해 가다가 항복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러자 윤선도는 세상을 등질 결심을 하고 뱃머리를 돌려 제주도로 향해 가던 중 보길도의 경치를 보고 반해 부용동이라 이름하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여러 업적의 영향과 계승
윤선도는 죽은 다음 해인 1672년 복관되었다. 1674년에 손자 윤이후(尹爾厚)가 1660년 승정원이 불태워버린 윤선도의 상소와 「예설」2편을 올렸으나 기각당했다. 1675년 2월에 윤선도는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1678년 9월에 ‘충헌’시호를 받았다. 그러나 1680년 윤8월에 증직과 시호가 취소되었다가, 1689년 봄에 증직과 시호가 회복되었다. 1791년 전라도관찰사 서유린(徐有隣)이 정조의 명을 받고 『고산유고』를 간행하였다. 1798년에 전라도관찰사 서정수(徐鼎修)가 윤선도의 본가에 보관된 목판본을 대본으로 빠진 부분을 수정하여 다시 간행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