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조선 광해군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조선 광해군

光海君
조선 전기국왕
시대조선 전기
직군국왕
양력 생일1575년 6월 14일
향년66세
Birth Color
스프링 부케 (Spring Bouquet)
#6FCF90
Second Color
아이보리 (アイボリー, Ivory)
#F8F4E6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11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2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의 제15대 국왕.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Lunar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음력 생일4월 26일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쌍둥이자리
별자리 주간쌍둥이자리Ⅲ: 탐구자의 주간
탄생성수성
탄생신헤르메스
Terrestrial

땅

탄생화뚜껑별꽃
꽃말작은 희망 · 조용한 기쁨 · 다시 열리는 마음 · 소박한 행운
탄생목무화과나무
Spirit

그 외

탄생주보드카 마티니
탄생색 (영문판)스프링 부케 (Spring Bouquet)
탄생색 (일어판)아이보리 (アイボリー, Ivory)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BIRTHDAY PEOPLE

생일 인물

BIRTHDAY HISTORICAL FIGURES

생일 역사 인물

Explore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전란 중 눈부신 활약과 광해군의 취약한 입지

한양을 떠나 의주까지 피난하게 되면서 권력의 중심이 행재소가 있는 국토의 서북쪽 끝, 의주로 옮겨지게 되자 한반도 전체가 구심점을 잃은 형국이었다. 조정이 유지되고 있는지조차 의심하는 백성들이 있는 상황에서 선조는 국왕의 권력을 왕세자에게 나누어주어 평안도와 함경도, 강원도, 황해도 등지를 다니면서 민심을 수습하고, 의병을 모집하도록 하였다. 분조(分朝), 말 그대로 조정을 둘로 나뉘는 특단의 조치가 취해졌다. 이에 반해 친형 임해군은 함경도로 들어가 근왕병을 모으고 민심을 수습하라는 선조의 명령을 잘 수행하기는커녕 국경인(鞠景仁)의 반란 때 사로잡혀 적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에게 넘겨졌다. 명나라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왔지만 계속해서 조선에게 일본과 화친할 것을 압박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대승을 거둔 권율(權慄)이 이후 명나라의 허락 없이 전쟁했다는 것을 이유로 벌주려 하기도 했다. 더욱이 국왕에게 보내야 할 황제의 칙서가 세자인 광해군 앞으로 되어 있었고, ‘부왕의 실패를 만회하라’는 말로써 노골적으로 선조의 실정을 언급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연립정권의 붕괴와 이어진 역모사건

1610년 김굉필(金宏弼), 정여창(鄭汝昌), 조광조(趙光祖), 이언적(李彦迪), 이황(李滉) 등 다섯 현인의 위패를 문묘(文廟)에 모시도록 한 것에 대해 정인홍이 강력하게 비판하고 나섰다. 자신의 스승인 조식이 빠진데다가 스승의 사상을 ‘도가에 가깝다’고 평가 절하한 이황이나 ‘척신정치기에 벼슬이나 탐했다’고 생각하는 이언적의 문묘 종사를 납득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에 정인홍은 이언적과 이황을 비판하고 격하하는 상소를 올리게 된다. 이 일을 보통 ‘회퇴변척(晦退辨斥)’이라 하는데, 이를 계기로 직접 연관이 있던 남인은 물론이고 서인까지도 정인홍을 공격하였다. 역모의 실체는 드러나지 않았지만, 진술을 통해 거명된 인물이 늘어나면서 조정 신료들까지도 줄줄이 연루되었고, 많은 사람들이 형을 받거나 쫓겨나게 되었는데 대부분 서인이나 남인들이었다. 소위 ‘칠서(七庶)’로 불리던 박응서(朴應犀), 박치의(朴致毅), 서양갑(徐羊甲), 심우영(沈友英), 허홍인, 김평손, 김경손 등 명문가 서자들이 서얼금고 폐지가 거부되자 불만을 품고 무리를 지어 화적질을 하던 중 문경 새재를 넘던 상인을 죽이고 은을 빼앗은 일이 있었는데 이것이 소위 은상 살인사건이다. 이 사건은 단순한 강력범죄사건이었는데, 이이첨과 김개(金闓), 김창후 등이 한희길(韓希吉), 정항 등과 모의하여 거짓자복 등으로 영창대군을 옹립하기 위한 역모사건으로 비화시켰다. 그리고 김제남과 인목대비가 선조의 병환이 위독해지자 광해군을 아들로 삼았던 의인왕후(懿仁王后)의 유릉(현재는 목릉(穆陵))에 무당을 보내어 주술을 행한 일이 밝혀졌고 저주 행위로 간주되었다. 계축옥사를 기화로 광해군이 직접 지시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죄 없는 동생을 죽이고, 왕실에서 어머니에 해당되는 인목대비를 쫓아내려고 했기 때문에 유학의 기본윤리인 형제간의 우애나 부모에 대한 효를 저버린 책임이 모두 광해군에게 돌아갔고, 이후 반정의 명분이 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권위 강화에 매달리다

광해군이 권위를 높이는 데 집착한 것은 신하들로부터 받은 존호를 보면 확실히 알 수 있다. 광해군은 역모사건을 진압할 때마다 존호를 받았다. 재위기간 중 총 여섯 차례 존호를 받았는데 처음 받은 것은 ‘체천흥운준덕홍공(體天興運俊德弘功)’이란 여덟 글자였는데 횟수를 거듭하면서 늘어나 최종적으로 ‘체천흥운준덕홍공신성영숙흠문인무서륜입기명성광렬융봉현보무정중희예철장의장헌순정건의수정창도숭업(體天興運俊德弘功神聖英肅欽文仁武敍倫立紀明誠光烈隆奉顯保懋定重熙睿哲莊毅章憲順靖建義守正彰道崇業)’이라는 48자로 늘어났다. 조선의 역대 왕들이 재위 중에 받은 존호 가운데 가장 긴 것이었다. 하지만 운수에 집착한 광해군은 가까이 하던 술사들이 서울의 기운이 쇠하였으므로 교하로 천도해야 한다고 하니 천도를 검토한 바 있고, 광해군 스스로도 ‘두 번이나 큰 일(노산군과 연산군이 폐위된 사건)을 겪은’ 창덕궁 중건은 해놓고도 머무르고 싶어 하지 않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반정과 광해군의 몰락

1623년 3월 서인 일파의 주도로 반정이라 불리운 무력 쿠데타에 의해 광해군 정권은 전복되었다. 오래 전부터 이귀 일파가 반역을 꾀하고 있다는 주장이 많았다. 하지만 광해군이 총애하던 상궁 김개똥이 그의 판단을 흐려놓은 탓이었는지 광해군은 귀담아 듣지 않았다. 이미 사태의 심각성을 깨달았을 때에는 이미 때를 놓친 상태였다. 12일 새벽 반정 세력의 기습으로 내시의 등에 업혀 탈출한 광해군은 “이이첨이 저지른 짓이 아닌가?”라고 물을 정도로 사태파악을 하지도 못하고 있었고, 대북파와의 사이도 멀어진 상태였다. 불과 천 여 명에 불과한 반정 세력의 병력으로 광해군은 너무나도 쉽게 무너졌다. 과연 인조반정을 일으킨 사람들의 명분은 무엇이었을까? 첫째 ‘폐모살제’였다. ‘어머니’의 위치에 있던 인목대비를 대비의 자리에서 끌어내렸으며, 동생 영창대군을 죽인 광해군은 강상윤리를 저버린 군주였다. 둘째 궁궐건설을 비롯한 수많은 토목공사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고 사직이 위기에 처하게 했다 셋째 명에 대한 사대를 소홀히 하고 후금과 밀통하여 명을 배신한 군주였다는 것이 인조반정을 일으킨 대의명분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