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조선 영조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조선 영조

英祖
조선 후기국왕
시대조선 후기
직군국왕
양력 생일1694년 10월 31일
향년81세
Birth Color
디베탄 레드 (Tibetan Red)
#81404A
Second Color
라일락 (ライラック, Lilac)
#D1BADA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7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7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의 제21대(재위: 1724년~1776년) 왕.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Lunar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음력 생일9월 13일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전갈자리
별자리 주간전갈자리Ⅰ: 강렬함의 주간
탄생성명왕성
탄생신하데스
Terrestrial

땅

탄생화칼라
꽃말우아한 순수 · 깊은 매혹 · 전환의 문 · 11월을 여는 고요
탄생목호두나무
탄생석오팔
Spirit

그 외

탄생주실버 피즈
탄생색 (영문판)디베탄 레드 (Tibetan Red)
탄생색 (일어판)라일락 (ライラック, Lilac)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BIRTHDAY PEOPLE

생일 인물

BIRTHDAY HISTORICAL FIGURES

생일 역사 인물

Explore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탕평과 민생의 안정을 통해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내다

18세기에 이르러 청나라가 강희, 건륭의 융성기를 맞으면서 조선과 청나라의 관계가 안정되었고, 이에 조선은 내치에 전념할 수 있었다. 17세기 후반은 붕당간의 대립이 표면화되었던 시기로서 이를 타개하기 위해 국왕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게 되었다. 숙종대 ‘환국’이 그것이라 할 수 있다. 환국은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통해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정국 운영의 방식이었다. 그러나 18세기 전반에 이르면 붕당간의 갈등이 충역(忠逆)의 시비로 비화되어 결국은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야기하였다. 그 결과 당을 막론하고 많은 사상자가 속출하였고, 혼란스러운 정국이 지속되었다. 초월적인 군주 상을 수립하고, 이에 근거하여 ‘탕평책’을 정책화한 것은 이러한 영조의 강력한 왕권 강화 의지를 표명한 것이었다. 영조는 탕평을 통한 국정의 안정을 기반으로 민생의 안정을 도모한 결과 조선의 국력과 문화수준은 높아지게 되었고, 사회경제의 발전과 안정이 증진되면서 조선의 중흥을 이끌어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붕당의 첨예한 대립과 탕평군주의 등장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붕당간의 견제를 유지하며 왕권을 안정시켜왔던 서인과 남인은 17세기 후반에 이르러 붕당정치 운영과정에서 첨예한 대립을 보여 왔다. 이러한 정국 속에서 강력한 왕권의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숙종[조선](肅宗)은 45년간 장기집권하면서 자신의 왕권을 안정시키기 위해 지금까지의 당파연립 방식을 버리고, 붕당을 자주 교체하는 방식을 택하였다. 이를 당시에는 ‘환국’이라 하였다. 환국정치의 운영은 말하자면 군주가 내각을 자주 교체하여 신하들의 충성심을 경쟁시키고 왕권을 강화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후에도 역시 붕당간의 대립은 해소되지 않았고, 충역(忠逆)의 문제로까지 비화되면서 많은 희생자를 낸 옥사가 발생하였기 때문에 후왕은 이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영조가 탕평책을 추진한 동력이 되는 것이기도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혼란한 정국의 우여곡절 끝에 왕위에 오르다

영조의 성은 이(李), 이름은 금(昑), 자(字)는 광숙(光叔), 현종[조선](顯宗)의 손자이고 숙종의 둘째 아들이며, 모친은 숙빈최씨(淑嬪崔氏)이다. 1694년(숙종 20) 9월 13일 창덕궁 보경당(寶慶堂)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났을 때에 다음과 같은 일화가 전해진다. 태어나기 사흘 전 붉은 빛이 동방에 뻗고 하얀 기운이 위를 덮었으며, 궁인들은 꿈에 흰 용이 보경당에 날아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또한 영조는 태어나면서부터 특이한 자질이 있고 오른 팔에 잇따라 용이 서린 것 같은 무늬 아홉 개가 있었다고 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탕평과 민생의 안정에 주력하다

영조는 붕당이 연합 정권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하고, 충역(忠逆)으로 나누어 상대 당을 공격하며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야기하는 행태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특히 영조는 ‘경종 연간 화를 당한 끝에 당론(黨論)이 살육(殺戮)의 근본이 되고 살육이 망국(亡國)의 근본이 된다는 것을 깊이 아시어 붕당을 없애고 세신(世臣)을 보전하는 것을 정치를 하는 요체로 삼았다.’ 고 할 만큼 당론이 살육으로 번지는 세태에 대한 경각심을 가지고 있었다. 영조는 이러한 붕당의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숙종대 제기된 탕평론을 정책화시켰다. 영조는 80 평생 자신이 뜻을 두고, 일생의 목표로 삼았던 것은 ‘탕평’이라고 자신하였다. 그런 만큼 탕평은 영조의 정국 운영 방식의 핵심이라 할 수 있다. 탕평은 『서경(書經)』「홍범(洪範)」조의 정치이념을 빌려온 것으로, 중국의 고대 제왕인 요순(堯舜)이 초월적인 성군(聖君)의 위치에서 편중되지 않고, 당파를 짓지 않는 탕탕평평의 정치를 이끌었다는 뜻이다. 뿐만 아니라 1762년(영조 38) 소론과 관련된 사도세자(思悼世子)를 노론의 주장에 따라 뒤주에 가두어 죽게 하는 사도세자 사건(思悼世子事件)을 겪는 등의 정치적 파란도 있었지만 영조는 일관되게 탕평을 시도하고자 하였다. 영조가 추구한 것은 ‘완론탕평(緩論蕩平)’으로, 노론과 소론 사이의 탕평에서 벗어나 당파의 시비를 가리지 않고, 어느 당파이든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등용하고자 하였다. 탕평을 통한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영조는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치기 시작하였다. 백성들이 국민의 의무를 대신하여 세금으로 내던 포목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균역법(均役法)을 제정하여 세금 제도의 합리화를 기하는 한편, 민중들의 세금 부담을 크게 줄였다. 이 외에도 균역법의 전형인 『양역실총(良役實摠)』을 각 도에 인쇄하여 반포함으로써 민생의 안정을 도모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정조(正祖)의 영조 계승과 문화적 전성기의 실현

영조는 1776년(영조 52) 83세로 죽으니, 조선시대 역대왕 가운데 재위기간이 52년이나 되었다. 처음에 올린 묘호는 영종(英宗)이었으나, 1890년(고종 27)에 영조로 고쳐 올렸다. 능은 경기도 구리시 인창동에 있는 원릉(元陵)이다. 영조는 역경을 딛고 군주로서의 위상을 확립하였으며, 탕평에 의한 정국안정을 바탕으로 그의 치세의 시기부터 현저해지는 조선왕조의 사회경제적 변화에 대응하여 민생문제의 해소를 통해 민심을 추스르며, 각 방면에 걸쳐 부흥기를 마련한 국왕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