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의 제22대(재위: 1776년~1800년) 왕.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바로크 로즈 Baroque Rose
비둘기깃 보라 鳩羽紫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아버지의 죽음을 딛고 왕위에 오르다
1762년 윤5월 11살의 왕세손은 아버지의 죽음 앞에서 어떠한 일도 할 수 없는 참담함을 겪어야 했다. 경희궁에서 영조를 모시고 있으면서 낮 동안에는 좌우를 떠나지 않았고, 밤에는 영빈(暎嬪)의 곁에서 위로했다. 1764년 영빈의 병이 위독했을 때에는 정성을 다해 간호하였고, 상을 당해서는 어버이를 잃은 것처럼 슬퍼했다고 한다. 당시 어머니 혜경궁과는 떨어져 지냈는데, 어머니의 병환 소식을 들으면 식음을 전폐하고 건강이 회복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후에야 수저를 들었다고 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규장각과 정조의 정치 개혁
정조가 왕으로 있을 당시 조선은 시급히 해결해야 하는 오래된 현안들이 많이 있었다. 우선 정치적으로는 당파의 폐단을 개혁해야 했다. 영조와 마찬가지로 정조는 당쟁으로 갈라진 조정의 화합을 도모하고, 널리 인재를 구하여 그들과 함께 조선의 묵은 문제들을 풀어나가고자 했다. 정조의 이와 같은 생각은 규장각(奎章閣)이라는 새로운 제도를 통해 구체화되었다. 규장각 제도는 정조 즉위년에 처음으로 만들어졌으며, 1781년(정조 5)에 완비되었다. 창덕궁 후원에 터를 잡아 새로운 전각을 세우고 기왕의 홍문관, 예문관, 사헌부, 사간원이 가지고 있던 명예와 권한을 규장각 각신들에게 부여하였다. 즉위 초반 유례없는 권한을 부여하며 개혁 정치를 보좌하게 했던 홍국영(洪國榮)이 그 권력을 스스로를 위해 사용하다가 축출 당하였기에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사인들을 모은다는 의심도 쉬 가시지 않았다. 규장각에는 당시 조선에서 구할 수 있는 내외의 서적들을 고루 갖추어 놓고, 이를 연구하며 조선에 필요한 개혁의 방안을 내놓기를 기대했다. 정조대 모든 개혁들은 규장각에서의 연구에 바탕하여 규장각을 거친 사람들의 손에 의해 이루어졌다. 정조는 규장각의 각신들과 함께 매년 봄에 내원에서 만나 꽃을 감상하고 활쏘기하고 시를 짓는 모임을 가졌는데, 척리들만 들어와 놀 수 있던 내원을 사대부들에게 열어줌으로써 이들을 가족과 같이 여긴다는 뜻을 내외에 보여주고자 한 것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정조가 꿈꾼 조선_정조의 경제-사회 개혁
정조는 정치 및 문화방면의 개혁 뿐 아니라 조선 사회의 공공성을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 사회경제적 개혁을 시행하였다. 민사국계를 바로잡으려는 정조의 고심은 왕이 되기 이전부터 할아버지의 치세 동안의 고민을 이은 것이었다. 1776년 대리청정을 하던 시절 정조는 궁방의 전토의 일부를 민간에 돌려주도록 하였고, 호조로 재정을 일원화하는 방안에도 기본적으로 찬성하였다. 국가 재정의 고갈 및 지속적인 부족 사태는 오랫동안 조정의 고민이었지만 민간의 경제적 여건도 좋지 않은 상태여서 과도한 세금을 줄이면서 재정을 건전화한다는 양립불가능한 정책을 고심해야 했다. 정조가 추진한 개혁은 그가 건설한 신도시 화성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실험되었다. 화성은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의 묘소를 이장하면서 건설하기 시작한 도시였다. 정조는 1804년 즉 세자가 15세가 되는 때에 왕위를 물려주고 정치를 떠날 결심을 했는데, 이때에 상왕이 머무를 행도로서 화성을 건설한 것이었다. 또 화성을 자급자족할 수 있는 곳으로 만들기 위한 경제적 연구도 진행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