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 후기에, 『사씨남정기』, 『구운몽』 등을 저술한 문신.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파스텔 라벤더 Pastel Lavender
벚꽃색 桜色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명문가 집안의 유복자
김만중은 조선이 병자호란을 겪고 있던 1637년(인조 15) 2월 10일 강화도에서 나오는 피난선 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호는 서포(西浦), 자는 중숙(重淑)이다. 그의 아명은 ‘배에서 태어난 아이’라는 뜻의 ‘선생(船生)’이다. 김만중이 태어나기 약 3달 전 12월 9일은 만주지역을 통일하고 청나라를 건국한 태종이 직접 10만 대군을 이끌고 조선을 침공한 날이다. 청군은 전광석화와 같은 속도로 진군하여 5일 만에 서울 근처까지 왔고, 놀란 조정은 강화도로 피난을 결정하였다. 이 때 김만중의 아버지인 성균관 생원 김익겸(金益兼)도 강화도로 피난을 하였다. 김만중의 어머니는 이때 21살로, 만삭이었다. 남편이 죽은 것을 알고는 자결하려 하였으나 종복이 만류하는 바람에 뜻을 이루지 못하고, 얼마 안 있어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김만중이다. 조선후기 사회의 방향성을 결정지었던 병자호란(丙子胡亂)의 와중에 극적으로 태어난 것이다. 유복자로 태어났으나 김만중의 집안은 광산 김씨로 당대의 명문가였다. 김만중의 외고조는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尹斗壽)이며, 병자호란 때 종묘사직의 위패를 가지고 강화도에 들어갔던 김만중의 외증조부 윤방(尹昉)은 이이(李珥)의 문인이면서 인조 대에 영의정을 지냈다. 김만중은 3살 때부터 어머니에게 글을 배웠다. 이러한 어머니의 기대에 부응하여 김만중은 16세에 진사에 합격하고 1665년(현종 6) 29살이 되던 해 정시에서 장원으로 합격하여 그해 5월 1일 성균관 전적으로, 22일에는 예조좌랑을, 이듬해 11월에는 정언을 제수 받으면서 관직생활을 시작하였다. 이로써 김만중은 순절자의 아들이자 예학에 으뜸가는 집안의 후예라는 후광을 입고 청요직을 두루 거치며 국왕의 최측근에서 활동하게 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시대의 소용돌이 한 가운데에서
김만중이 관직생활을 했던 현종[조선](顯宗), 숙종[조선](肅宗) 연간은 조선후기 정치사에 있어서 가장 다변하고 치열했던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통설에서는 이 시기를 붕당정치기의 틀에서 설명하고 있다. 현종 대에 이르면 두 차례의 예송(禮訟)을 거치면서 붕당간의 갈등이 격화된다. 예송은 왕실 상례에 관한 서인(西人)과 남인(南人) 관료들의 이견으로 학문적・정치적 갈등 양상을 보인 사건이다. 김만중은 노론으로서 출사한 뒤 두 차례의 예송과 두 차례의 환국을 정국의 중심에서 정면으로 겪을 수밖에 없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관직생활과 유배
29살에 처음 출사를 해서 순조롭게 관직생활을 시작한 김만중은 그의 관직생활 동안 주로 홍문관, 사헌부를 중심으로 활동하였으며, 거리낌 없이 자신의 의견 개진을 잘하여 자주 임금에게 꾸짖음을 당하였다. 이는 그의 성품 탓인 것도 있겠지만, 서인 노론의 중심에 있었던 그의 가문을 생각하면 이미 예견된 일이기도 했다. 1668년(현종 9)에 김만중은 홍문관 부수찬으로 있으면서 임금이 허적에게 내관을 보내어 문안한 것을 극력 비판하다가 그 자리에서 파면되었다. 옆에 있던 영의정 정태화(鄭太和)를 비롯하여 여러 사람들이 김만중을 변호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김만중의 관직생활은 영의정 허적을 비판한 일로 중단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만중이 허적은 그릇된 예론을 주장하였으며, 영의정이 된 뒤에 ‘형벌과 복을 주는 권력이 임금에게 있지 않다.’는 말을 하는 등 여러 가지로 부적절한 행동을 보였기에 군자가 아니라며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현종은 김만중이 허적과 당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영의정이 된 것을 그르다 여겨 근거 없이 비난하는 것이라고 하자, 김만중은 군자의 당과 소인의 당이 조정에 동시에 있을 순 없다며 소인인 허적을 허용할 수는 없는 일이라고 자신의 뜻을 꺾지 않았다. 이 일은 서인계 신료들의 변호로 해가 넘어가도록 결론이 나지 않다가 다음 해인 1674년(현종 15) 정월이 되어서야 김만중의 유배가 결정되었다. 김만중은 첫 번째 유배에서 2달 만에 풀려났다. 1680년(숙종 6) 경신환국 이후 김만중의 관료생활도 다시 활기를 띤다. 그는 이 해에 대사성, 홍문관 제학, 대사헌, 예문관 제학, 대사간 등에 제수되었지만 소를 올려 모두 체직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1682년(숙종 8) 1월 1일 김만중은 예조참판에 제수되고, 그 이후에는 다시 순조로운 관직 생활을 하게 된다. 대사헌, 예조판서, 병조판서, 좌참찬 등을 거쳐 1686년(숙종 12) 9월 17일에는 양관 대제학을 겸하게 됨으로써 문신으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문학과 벗을 삼다
김만중은 유배지에서 많은 문학작품을 창작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바로 『구운몽(九雲夢)』이다. 이 소설은 그가 장희빈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책봉하는 것을 반대하다가 선천에 유배된 1688년(숙종 6)년에 저술에 착수하여 다시 기사환국으로 노론이 실각하게 되는 이듬해에 남해 유배 도중 완성했다. 이 소설의 저술 동기에 대해서는 그가 혼자 적적하게 계실 어머니를 걱정하여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지었다는 견해가 일반적이다. 이는 정조[조선](正祖)가 “김만중이 그의 어머니를 즐겁게 해드리기 위해 구운몽을 지었던 것처럼, 나도 요새 어머니(혜경궁 홍씨)를 위해 『시경』에서 100편을 선정하여 『모시백선』이라 이름하고 경들에게 분담해서 언문으로 번역하게 하였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추측할 수 있다. 이 작품에 대하여 이재(李縡)는 불교적인 내용을 담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자신의 충정을 알아주지 않는 세상에 대한 원망이 담긴 굴원의 『초사』「이소」의 모티프를 차용했다고 한 것으로 보아, 귀양살이를 하는 김만중의 마음이 투영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위의 두 소설 외에 그의 저술로는 『서포만필(西浦漫筆)』과 그의 사후 간행된 문집 『서포집(西浦集)』이 있는데, 이들 속에서는 특히 김만중의 여러 시들이 주목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