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김옥균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김옥균

金玉均
조선 후기문신
시대조선 후기
직군문신
양력 생일1851년 2월 23일
향년43세
Birth Color
포에버 블루 (Forever Blue)
#839ABB
Second Color
유채꽃색 (菜の花色)
#FFEC47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22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4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우리나라 개화운동의 대표적 인물이자 갑신정변의 주모자.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물고기자리
별자리 주간물고기자리Ⅰ: 영혼의 주간
탄생성해왕성
탄생신포세이돈
Terrestrial

땅

탄생화살구꽃
꽃말아가씨의 수줍음 · 의혹(신비로운 설렘) · 아름다운 시절
탄생목소나무
탄생석애머시스트
Spirit

그 외

탄생주스카이랜드 피즈
탄생색 (영문판)포에버 블루 (Forever Blue)
탄생색 (일어판)유채꽃색 (菜の花色)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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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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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오경석이 얻으려 했던 북촌의 양반 자제

3·1운동 당시 민족대표 33인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세창은 19세기 후반 그의 아버지인 오경석(吳慶錫)이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동지를 얻어 이들을 통해서 혁신의 기운을 일으키고자 하였다고 회고한 바 있다. 이는 개화파가 형성된 경위와 관련된 증언인데 오경석은 당시 상당한 식견을 가진 인물이었지만 역관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나라의 운명을 바꾸는 데 큰 힘을 발휘할 수 없었다. 따라서 대신 양반집 자제들 가운데 똑똑한 사람을 육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변화를 도모하려 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오경석이 얻으려 했던 북촌의 양반 자제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인물을 꼽자면 바로 김옥균(金玉均)을 들 수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성장과 사상 형성

김옥균은 처음부터 북촌에서 태어난 것은 아니었다. 그는 1851년 충청도 공주군(公州郡) 정안면(正安面) 광정리(廣亭里)에서 김병태(金炳台)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당시 세도가문이었던 안동 김씨의 일원이기는 하였지만 크게 출세하지 못했고 시골에서 근근이 먹고사는 처지였다. 하지만 그의 나이 6세 때인 1856년 일가인 김병기(金炳基)의 양자로 들어가면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었다. 김병기는 병자호란 때 절의를 지킨 김상용(金尙容)의 직계 후손으로 여러 지방관을 거쳐 형조참의(刑曹參議)까지 지낸 인물이었다. 김옥균을 비롯한 북촌의 양반 자제들에게 영향을 미친 인물로는 앞서 언급한 오경석과 유홍기(劉鴻基)를 들 수 있다. 박지원(朴趾源)의 손자인 박규수(朴珪壽)도 김옥균 등 북촌 양반 자제들에게 큰 영향력을 미쳤다. 갑신정변 당시 그의 동지였던 박영효(朴泳孝) 회고에 따르면 벼슬자리에서 물러난 박규수의 사랑방에서 자신을 비롯하여 김옥균, 홍영식(洪英植), 서광범(徐光範) 등이 평등사상을 배웠다고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민씨 척족과의 갈등

고종은 아버지인 흥선대원군을 제치고 친정을 시작하면서 대외정책의 변화를 시도하였다. 강화도조약의 체결도 그 일환이었으며 1880년대에 들어서면 수신사(修信使), 영선사(領選使),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연이어 파견하는 등 문호개방에 따른 후속조치를 본격적으로 추진하였다. 이 과정에서 고종이 추진하던 일련의 개화정책을 뒷받침하는 신진정치세력이 등장하였다. 이러한 신진정치세력 가운데 하나가 김옥균이 이끈 정치그룹이었다. 이 그룹에는 그 이외에 홍영식, 박영효 형제, 서광범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개화당의 형성과정에 관해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실린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김옥균은 과거에 급제한지 10여년 동안 벼슬길이 열리지 않다가 서양학문을 연구하고 부강책을 역설하면서 그의 주위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그를 영수로 추대하기 시작했다고 한다. 개화당의 활동의 흔적은 1879년 김옥균이 봉원사(奉元寺)에서 이동인을 만나는 것부터 확인된다. 그는 김옥균과 만난 직후 일본으로 밀항을 하였는데 이를 김옥균이 권유하였다고 보기도 한다. 김옥균도 1881년 11월 이러한 분위기를 틈타 직접 일본에 건너가 이듬해 6월까지 머물면서 일본의 실태를 시찰하고 후쿠자와 유기치(福澤諭吉)의 주선으로 일본 정계의 여러 인사들과 접촉하기 시작하였다. 김옥균의 두 번째 일본행은 1882년에 있었다. 그 해 6월 임오군란(壬午軍亂)이 일어나자 정부에서는 이를 사과하기 위해 사절단을 파견했는데 이때 정사를 맡았던 인물이 박영효였고 서광범은 서장관이었으며 김옥균은 공식적인 직위 없이 일종의 고문의 자격으로 참여하였다. 이 기사에 따르면 조정에서는 임오군란을 수습하기 위해 김옥균과 박영효 등을 일본에 보냈으며 일본도 이들이 자신을 사모하고 있는 점을 기뻐하여 배상금을 깎아주었다고 하였다. 실제로 당시 김옥균은 일본에서 17만원의 차관을 조달하는 데 성공하여 이 가운데 5만원으로 임오군란의 1차 배상금을 상환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갑신정변 일어나다

차관 도입에 실패한 채 일본에서 돌아온 김옥균은 중대한 선택의 기로에 놓이게 되었다. 이대로라면 그와 개화당은 정치적으로 고사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무언가 획기적인 정치적 변화가 있어야만 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정변을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하였다. 우선 일본으로부터 자객을 불러들여 조정의 중신들을 일시에 암살하는 방안부터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곧 김옥균과 개화당에게 긍정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1884년에 들어서면서 베트남 문제를 둘러싸고 청국과 프랑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는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조선에 주둔하고 있던 청국 병력 가운데 1,500명을 철수한다는 것이었다. 따라서 김옥균과 개화당은 조선에서 분쟁이 발생하더라도 청국이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전망을 하게 되었다. 『갑신일록』은 김옥균이 일본에 망명한 이후 갑신정변의 과정을 기억을 되살려 기록한 일종의 회고록이다. 김옥균은 박영효, 서광범 등 개화당 인사들과 함께 인천에서 일본 상선을 얻어 타고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갑신정변이 실패한 후 김옥균을 비롯한 개화당 인사들이 일본으로 망명하는 과정에 대한 『고종시대사』의 기사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망명객 김옥균

갑신정변 직후 일본은 김옥균 등의 망명을 일단 받아들였다. 그것은 갑신정변이 한일 합작의 쿠데타였기 때문에 불가피한 일이었다. 김옥균을 돌려보낼 경우 일본이 이 정변에 관여한 사실이 명백히 드러날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김옥균 일행에 대해서도 냉담한 태도를 취했다. 이제는 이들이 별로 이용 가치가 없어진데다가 앞으로 조선과의 외교적 분쟁의 빌미만 제공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를 제외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徐載弼) 등은 모두 신변의 불안을 느껴 다시 미국으로 건너갔다. 조선 정부는 외교 경로를 통해 김옥균의 송환을 요구하는 한편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는 양면 전술을 구사했다. 조선 정부가 이렇게 그에 대해 신경을 곤두세운 것은 당시 오이 겐타로(大井憲太郞)와 고바야시 쿠스오(小林樟雄) 등 일부 일본인들이 김옥균을 앞세워 조선을 침공하자고 주장하는 사건 즉 오사카사건이 일어났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김옥균은 지운영 사건 직후 이에 대해 해명하는 상소문을 고종에게 올리기도 하였다. 1886년 김옥균은 일본에서 망명하고 있을 때 고종에게 보내는 상소를 썼다. 이렇게 김옥균이 양국 간의 마찰의 불씨가 되자 일본 정부는 그를 변방으로 추방하는 방법으로 이 문제를 모면하려 하였다. 김옥균이 상해에서 암살되는 과정에 대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사이다. 황현을 비롯한 조선 사람들은 이 책을 통해서 김옥균 암살사건의 생생한 모습을 들을 수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그가 죽고 난 뒤

김옥균이 죽은 후 그의 시신은 본국으로 송환되어 양화진(楊花津)에서 능지처참되었다. 하지만 그는 죽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복권될 수 있었다. 그것은 청일전쟁의 발발과 동시에 조선에서는 일본의 군사적 압력에 의해 개화파 정권이 수립되었고 갑신정변 당시 그의 동지였던 박영효가 이 정권에 참여하여 권력을 잡았기 때문이었다. 한편 일본에서는 김옥균이 죽은 후 그에 대한 추모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일본 정부는 이러한 추모 분위기를 틈타 청국 정부의 처사를 비판하는 방법으로 청국에 대한 적대감을 자국 국민들 사이에 확산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를 청국과 전쟁을 일으키는 데 정치적으로 활용하였다. 김옥균은 죽고 나서야 일본에게는 이용가치가 생겨난 것이다. 김옥균은 해방 후 남북한에서 모두 근대화의 선각자로서 높이 평가받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