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오리엔트 블루 Orient Blue
채종유색 菜種油色
생일 인물
음력 11월 7일 생일 인물
전체 20명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1898년에 성균관에 입교했다가,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입했으며, 만민공동회 운동 때에는 간부급으로 적극적 활동을 전개하여 그 해 연말에 독립협회가 해산 당할 때 일시 투옥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독립협회 해산 후에는 향리에 돌아와 문동학원(文東學院) 등에서 신교육에 종사하였다. 1904년에는 신규식(申圭植) 신백우(申伯雨) 등과 함께 향리의 이웃에 산동학당(山東學堂)이라는 신식학교를 설립하였다. 1905년에 장지연(張志淵)의 요청으로 『황성신문(皇城新聞)』의 논설기자가 되어 활동하였다. 이해 11월 18일에 소위 「을사조약」이 강제 체결되고 일제가 이를 비밀에 부치자 장지연이 1905년 11월 20일자 『황성신문』에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 放聲大哭)」이라는 논설을 기표하여 이를 폭로 규탄하자 『황성신문』이 무기 정간되었다. 이에 양기탁(梁起鐸)의 요청으로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의 논설기자로 자리를 옮기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대한매일신보』는 발행인이 외국인이어서 일제의 사전 검열을 받지 않았으므로 이 신문에서 자유롭게 필봉을 휘둘러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과 친일파의 매국행위를 통렬하게 비판하고 국권회복에 온 국민이 성력을 다할 것을 계몽하였다. 1907년 4월에 양기탁 안창호(安昌浩) 등을 중심으로 국권회복운동의 비밀 결사로서 신민회(新民會)가 창건되자 이에 가입하여 그 주요회원으로 활동하였다. 신채호는 신민회의 이념과 목표를 그의 논설 속에 충실하게 반영하여 국민을 계몽했으며, 신민회의 대변인과 같은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가 『대한매일신보』에 연재한 「이십세기 신국민(二十世紀 新國民)」은 신민회의 이념을 국민에게 잘 천명한 대표적 논설이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당시 문화계에는 존화사관에 젖은 중세유교사학과, 또한 일본 사학자들이 근대사학의 미명하에 『조선사(朝鮮史)』 등을 새로 저술하여 조선이 고대이래 중국과 일본에 복속했으며 일본은 가야에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를 설치하여 남한을 지배했다는 등 초기식민주의사관을 지어내어 퍼뜨리면서 일본제국주의의 한국침략을 위한 정신운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그는 국권회복을 위하여 가장 중요한 원동력인 국민의 〈애국심〉을 계발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민족주의적 〈역사〉를 저술하여 온 국민에게 읽히는 일이 가장 시급하고 중요함을 통감하고, 격렬한 필치로 한편으로는 존화주의에 젖은 중세사학을 비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일제의 초기 식민주의사관의 거짓 학설에 학문적 투쟁을 전개하면서 새로운 근대민족주의사관에 의하여 한국 역사를 새로이 체계화하는 위의 저서들을 저술함으로써 한국의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한 위대한 업적을 한국민족에게 바친친 것이었다. 1910년 4월에 신민회가 국외 독립군기지 창건을 위하여 신민회 간부 일부를 망명시키게 되자, 그 일단이 되어 국외로 망명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또한 1914년에 윤세복이 경영하는 동창학교(東昌學校)에서 청소년들에게 국사교육을 시키는 한편 《조선사(朝鮮史)》(失傅)을 저술하였다. 이 시기에 만주 일대의 고구려 유적을 답사하여 그의 민족사학의 실증적 토대를 더욱 발전시키고 북경에 이주하여 국사연구와 문필활동에 종사하였다. 1919년 3 1운동이 일어나자, 북경으로부터 상해로 가서 1919년 4월 10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립을 위한 최초의 29인의 모임(임시정부 발기회의)에 참가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1923년 1월에는 의열단의 요청을 받고 의열단의 독립운동노선과 투쟁방법을 천명하는 유명한 「조선혁명선언(朝鮮革命宣言)」을 집필하였다. 1923년 1월에 상해에서 국민대표회의(國民代表會議)가 개최되자, 창조파에 가담하여 상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임시정부의 수립을 주장하였다. 국민대표회의가 실패로 끝나자 크게 실망하여 칩거하면서 국사연구에 종사하였다. 이 시기에 『조선상고문화사(朝鮮上古文化史)』(1931년 서울에서 간행), 『조선사연구초(朝鮮史硏究艸)』(1930년 서울에서 간행)에 실린 논문들을 집필하여 근대민족사학을 확립하는데 박차를 가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이후 점차 무정부주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갖고 1926년 「재중국조선무정부주의자연맹(在中國朝鮮無政府主義者聯盟)」에 가입했으며, 1927년 9월에는 「무정부주의 동방연맹(無政府主義 東方聯盟)」에 이필현(李弼鉉)과 함께 조선대표로 참석했으며, 1928년 4월에는 그 스스로 무정부주의 동방연맹 북경회의를 개최했다. 이 회의 결의에 따라 독립운동자금을 염출하려다 일제관헌에 체포되어 10년형의 선고를 받고 복역 중 1936년 여순감옥에서 옥사 순국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서훈
정본 서훈 기록입니다.
- 대통령장 · 1962년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