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의 제26대 왕, 고종의 아버지로, 흥선대원군에 봉해진 왕족.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릴라 Lilas
오리깃색 鴨羽の色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흥선대원군에 대한 엇갈리는 평가
“대원군이 10년 동안 집권하면서 그 위세를 내외에 떨치었다. 대원위분부(大院位分付)란 다섯 자가 삼천리 강토를 풍미하여 그 위세가 우레와 불 같으므로, 모든 관리와 백성들은 두려움에 휩싸여 항시 관청의 법을 우려하였다. 또 조석(朝夕)으로 유언비어가 판을 쳐 서울에 온 시골 사람들을 체포하여 죽이므로, 궁벽한 산중 촌민과 멀고 먼 해변의 어민들은 살고 싶은 마음을 잃게 되었다.” 『매천야록(梅泉野錄)』에 서술된 내용이다. 이대로라면 흥선대원군은 대단한 독재자였던 셈이다. 하지만 그 바로 뒤에는 “민씨들이 집권한 이후 서민들이 그들의 착취를 견디다 못해 종종 한탄을 하며 도리어 대원군의 정치를 그리워했다”라는 내용이 이어지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흥선군 이하응, 대원군이 되다
이하응(李昰應)은 1820년 영조의 현손 남연군 구(南延君球)의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시백(時伯)이고 호는 석파(石坡)이다. 1841년 흥선정(興宣正)이 되었고 1843년에는 흥선군(興宣君)에 봉해졌다. 종친부의 유사당상(有司堂上)과 오위도총부의 도총관 등의 관직을 역임했다. 1863년 12월 8일 철종이 죽자 그의 둘째 아들 명복이 출계(出系)하여 익종(효명세자)의 뒤를 잇는 형식으로 왕위에 올랐다. 그리고 그는 다음날 흥선대원군에 봉해졌다. 대원군이란 국왕의 생부를 일컫는 말이다. 조선시대에는 그 이외에도 덕흥대원군, 전계대원군 등 대원군이 3명 더 있었다. 덕흥대원군은 선조의 생부이며 전계대원군은 철종의 생부이다. 인조의 생부인 정원군은 대원군을 거쳐서 원종으로 추존되었다. 이하응만이 대원군이란 지위로 오래 생존하면서 역사적 인물이 되었다. 그 결과 대원군하면 으레 그를 떠올리게 된 것이다. 하지만 앞서 살펴보았듯이 『매천야록』에서는 1863년부터 1873년까지 10년간을 흥선대원군 집권기로 보았다. 마찬가지로 야사인 『대한계년사(大韓季年史)』에도 고종의 즉위 직후 대원군으로 하여금 여러 방면에 걸친 정사(政事)인 서정(庶政)에 참여하도록 하고 신하가 아닌 예법(不臣之禮)으로 대우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공식 사료에는 흥선대원군이 국정에 참여한 흔적이 이보다는 늦게 나타난다. 1864년 흥선대원군의 주장에 따라 종친부 관제의 개정이 시작되었으며 대원군의 왕궁 출입을 위해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전용문을 신설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운현궁과 금위영 사이에 전용문을 설치한 것에 관한 『고종시대사』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는 동가(動駕) 즉 국왕의 행차에 편하도록 문을 설치하였다고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흥선대원군의 전용문으로 쓰였다. 이듬해인 1865년에는 조대비가 경복궁 중건(重建)을 명하면서 이 일을 흥선대원군에게 일임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흥선대원군의 내정개혁
흥선대원군의 집권은 60년간 이어진 안동 김씨 세도권력의 몰락을 의미했다. 안동 김씨들이 맥없이 무너진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여러 야사(野史)에는 흥선대원군의 정치적 술수에 안동 김씨가 당한 것으로 서술되어 있다. 그러한 측면이 전혀 없지는 않았지만 근본적인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철종이 죽기 바로 전 조선 전체를 뒤흔들어 놓은 큰 사건이 있었다. 1862년에 일어난 임술민란(壬戌民亂)이 그것이다. 경상도 단성에서 시작된 이 민란은 곧바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민란이 발생한 것은 당시 삼정(三政)이라고 불리던 조세 징수 과정에서 많은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상황 때문에 안동 김씨의 정치적 리더십이 흔들렸으며 흥선대원군의 집권을 허용한 것이다. 따라서 흥선대원군은 흐트러진 국가체제를 재정비하는 한편 삼정문제에 대한 직접적인 대책도 내놓아야만 하였다. 황현은 이 기사에서 사창 설치가 흥선대원군이 내놓은 여러 제도 가운데 가장 좋은 것이라고 평가하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폈는가?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 하면 바로 떠오르는 말이 쇄국이다. 그가 완고한 배타주의자로서 강경한 쇄국정책을 펴는 바람에 시대의 흐름을 놓쳤다는 것이다. 그의 내정개혁의 성과는 어느 정도 평가를 받고 있지만 대외정책에 대한 평가는 매우 인색한 것이 사실이다. 그의 대외정책이 결과적으로 시대적 대세를 거스른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완고한 배타주의자라는 그의 이미지는 다시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쇄국이란 말은 개항 이후 일본에서 들어온 말로 갑오개혁 이후가 되면 한국에서도 본격적으로 쓰이기 시작하였으며 그 결과 흥선대원군의 대외정책에까지 소급해서 적용되었다. 흥선대원군 시절에는 당연히 쇄국이란 말 자체가 없었다. 흥선대원군이 서양 여러 나라의 통상요구를 단호히 거부하였고 이 과정에서 병인양요와 신미양요라고 하는 두 차례의 무력 충돌까지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은 그만의 특별한 대외정책을 새로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었다. 신미양요 당시 대원군과 미국 제독 대리 사이에서 주고받은 문답이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그는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이념형의 정치인은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철저한 현실 정치인으로 정치적 리더십을 확립하기 위한 수단으로 단호한 액션을 취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물거품이 되어 버린 재집권 시도
1873년 11월 흥선대원군이 궁궐을 출입할 때 이용하던 전용문이 굳게 닫혔다. 최익현(崔益鉉)이 흥선대원군의 시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린 바로 뒤였다. 최익현은 이 상소에서 흥선대원군이 권좌에서 물러날 것을 정면으로 요구하였다. 최익현의 상소에 관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황현은 최익현이 고종의 지시에 의해 상소를 한 것은 아니지만 고종은 내심 그의 상소를 지지하고 있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왕명으로 전용문이 폐쇄된 것은 그로 하여금 물러나라는 신호로 볼 수 있다. 흥선대원군은 닫힌 문 앞에서 발길을 돌려 양주 곧은골(直谷)로 내려가 은거하였다. 흥선대원군의 실각은 당시 공식문서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다. 고종은 이제 진정한 의미의 친정을 시작하면서 흥선대원군에 대한 정책적 차별화를 시도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흥선대원군이 심어놓은 인물들을 솎아내었으며 그 빈자리를 자신의 처가인 민씨들로 채웠다. 권좌에서 물러난 흥선대원군은 재집권의 꿈을 버리지 않았다. 흥선대원군이 이 사건에 직접 개입했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지만 당시 배후에 그가 있다고 의심받았다. 이 기사에 따르면 사건은 안기영 등이 모의한 것으로 과거시험장에 모인 군중을 선동하여 폭동을 일으켜 궁궐로 쳐들어가 고종을 폐위하고 대원군의 서자인 이재선을 옹립한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중간에 흥선대원군이 개입하면서 권력다툼으로 비화하였다. 명성황후는 군인들을 피해 궁궐을 탈출하였고 고종은 흥선대원군의 입궐을 요청할 수밖에 없었다. 이 기사에 따르면 난병(亂兵)들은 궐내로 난입하여 왕비까지 해치려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은 이때 왕명으로 입궐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이렇게 재집권하는 데 성공하였다. 흥선대원군이 납치된 사건에 관한 『고종실록』의 기사이다. 실록에는 대원군이 천진으로 행차하다라고만 기록되어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일본과 손을 잡았지만
1894년 6월 21일 새벽 일본군이 경복궁을 점령했다. 날이 밝자 흥선대원군이 일본군의 호위를 받으면서 궁궐에 들어섰다. 흥선대원군의 입궐에 관한 『고종시대사』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서는 대원군이 왕명에 따라 입궐한 것처럼 되어 있지만 실제로는 일본공사의 강권에 의한 것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대원군 입궐을 전후하여 김가진과 안경수 등 일본파 10여명이 함께 입궐한 것으로 되어 있으니 경복궁 점령의 목적이 친일적인 정부의 수립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로써 흥선대원군은 실각한 지 20여년 만에 다시 집권하게 되었다. 달라진 점은 과거 흥선대원군이 일본에 문호를 개방하는 것을 반대했는데 이번에는 일본군에 업혀서 권력을 잡았다는 점이다. 하지만 흥선대원군과 일본의 우호적 관계는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에 김홍집(金弘集)을 중심으로 하는 개화파 정부를 수립하여 갑오개혁을 추진하도록 강요하는 한편 흥선대원군을 서서히 국정에서 배제하려 하였다. 흥선대원군도 이에 맞서 일본을 축출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당시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청군 진영에 밀서를 보내는 한편 심복을 남부지방에 파견하여 농민군으로 하여금 항일봉기를 하도록 부추겼다. 이때 흥선대원군의 밀서가 일본군의 손에 들어가는 바람에 그는 다시금 권좌에서 물러나지 않을 수 없었다. 흥선대원군의 실각과 관련한 『고종실록』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고종은 모든 사무와 군사업무를 태공(흥선대원군)께 아뢰도록 하라는 6월 22일의 전교를 거두어들이라고 하였다. 흥선대원군을 명시적으로 섭정(攝政)의 지위에서 끌어내린 것이다. 흥선대원군은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 때 마지막으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하였다. 을미사변에 대한 『고종실록』의 기사이다. 이 사건 때에도 흥선대원군은 입궐하였다. 왕후(명성황후)를 해치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