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개항기 동학 접주, 동학농민군 대장 등을 역임한 지도자.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봄베이 브라운 Bombay Brown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개요
전봉준(全琫準, 1855~1895)은 1893년 고부 민란을 주도하고 1894년 동학농민운동에서 총대장으로 활동한 농민군의 최고 지도자이다. 동학농민운동을 통해 부패한 집권 세력과 외세를 척결하고 임금과 백성이 함께 다스리는 ‘군민공치(君民共治)’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지만, 조직의 분열과 화력의 열세로 동학농민운동이 패배한 후 체포되어 처형당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고부 민란
1894년 1월 10일 전봉준과 고부의 농민들은 군수 조병갑(趙秉甲)의 학정에 대항하여 민란을 일으켰다. 후일 체포된 후 전봉준은 조병갑이 만석보의 축조 및 부친 조규순의 송덕비 건립 명목으로 백성들에게 노동력과 비용을 부담시켰을 뿐 아니라, 그 외에도 과도한 세금 징수, 협박 및 무고, 비리와 착복 등 다양한 방법으로 농민들을 수탈하여 난을 일으켰다고 진술했다. 전봉준은 또 빼앗길 것이 없는 자기는 피해를 입지 않았지만, 백성들이 원통하여 한탄하므로 백성을 위해 해를 제거하고자, 그리고 세상일이 날로 그릇되어 가므로 분개하여 한번 세상을 건지고자 하는 생각에서 봉기를 일으켰다고 진술하였다. 전봉준에게는 사회개혁적인 지향성이 있었던 것이다. 혹은 전봉준의 부친도 조병갑에게 탐학을 시정할 것을 요구하다가 맞아 죽었다는 설도 전한다. 1893년 11월부터 전봉준과 농민들은 조병갑 또는 전주 감사에게 폐정의 시정을 호소했지만 모두 거부당했다. 그 과정에서 1893년 11월에 사발통문을 작성하고, 고부성 점령, 조병갑 처형, 탐관오리 처단, 전주성 점령, 서울 진격 등을 내용으로 하는 봉기를 계획했지만, 조병갑이 익산 군수로 전출되어 유보했던 것인데, 그가 1894년 1월 9일 고부 군수로 재임용되자 행동에 나선 것이다. 20명의 사발통문 서명자 중 전봉준, 최경선, 김도삼 등의 주도로 고부 농민들은 1월 10일 이평의 말목장터를 출발하여 고부 관아를 습격했지만, 조병갑은 이미 도망친 후였다. 전봉준은 2월 20일경 봉기를 전라도 전역으로 확산하고자 ‘보국안민(輔國安民)’을 취지로 하는 ‘창의격문(倡義檄文)’을 각지에 보내고 함열의 조창(漕倉: 세곡의 수송과 보관을 위하여 강가나 바닷가에 지어 놓은 곳집)을 습격해 전운영(轉運營)을 혁파할 것을 촉구했지만, 이 격문은 당시 삼남 지역의 세금인 쌀을 서울로 실어 나르는 역할을 하며 각종 폐단을 일으키던 전운영의 폐지 등을 거론하며 봉기를 촉구한 내용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동학농민운동 1차 봉기: ‘보국안민(輔國安民)’, ‘관민상화(官民相和)’
고부 민란이 원만한 해결을 보지 못하고 동학농민운동이라는 더 큰 봉기로 이어진 것은 뒤늦게 도착한 안핵사 이용태가 박원명의 수습책들을 무시하고 주모자를 색출하여 처벌했을 뿐 아니라, 민란에 동학교도가 다수 참여했다는 이유로 무관한 교도들까지 탄압했기 때문이었다. 이로 인해 고부 민란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던 무장의 손화중과 태인의 김개남까지도 호응하여 1894년 3월 20일 손화중의 거점인 무장에서 봉기를 일으킨 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봉기 당시 무장 포고문을 발표하여 거병의 목적이 ‘보국안민’임을 밝혔다. 『동학사』에는 발표 시기가 갑오년 정월로 되어 있고 당시 아직 합류하지 않았던 김개남도 서명자로 등장하는 등의 오류가 있다. 이에 농민군은 무장에서 고부, 백산을 거쳐 황토현 전투와 장성의 황룡촌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후, 4월 27일에는 감영이 있는 전주성까지 함락시켰다. 하지만 포고문에도 드러나듯이, 전봉준은 폐정의 근원을 탐관오리들로 보았을 뿐 조선 왕조를 전복할 생각은 없었다. 이러한 생각을 가진 전봉준이었기에, 전투 과정에서 농민군의 희생이 컸던 데다 정부가 청나라에 농민군을 진압할 군대의 파견을 요청했음을 알자 5월 8일 전주화약을 맺고 철병하였다. 농민군의 요구는 삼정(三政)의 조세 제도를 개혁하고 외국 상인의 상거래를 개항장에 한정하는 한편, 체포된 동학교도들을 석방하고 대원군의 섭정을 시행하라는 것 등이었다. 또한 전라도 지역의 치안과 행정의 마비 상태를 수습하기 위해 전라도관찰사 김학진(金鶴鎭)은 전봉준과 협의하여, 전라도 53개 군현에 농민군 지도자가 읍정을 시행하는 집강소(執綱所)를 설치하기로 했다. 집강소를 통해 동학농민군은 지역의 봉건적 신분질서와 지주제를 개혁하고자 했고, 전봉준은 금구, 원평을 근거로 전라우도를, 김개남은 남원을 중심으로 전라좌도를 호령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동학농민운동 2차 봉기: ‘척왜척화(斥倭斥華)’의 실패와 처형
조선 정부는 전주성이 함락된 직후인 4월 말 정식으로 청나라에 파병을 요청했다. 청은 즉시 군대를 파견했고, 일본 또한 이를 천진조약(1885) 위반으로 간주하여 조선 정부의 뜻에 반해 군대를 파병했다. 또한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6월 17일에 청과의 전쟁을 결정하고, 전쟁의 편의와 명분을 확보하기 위해 21일에 군사력을 앞세워 경복궁을 점령한 후 조선 정부에 각종 근대적 개혁을 강요하니, 이것이 청일전쟁과 갑오개혁의 시작이었다. 전봉준은 일본군이 궁궐을 범했다는 소식을 7월 남원에서 처음 들었지만, 일단 일상생활로 돌아갔다. 황현의 『오하기문(梧下記聞)』은 1864년부터 1907년까지의 역사를 월일별로 기록해놓은 책으로, 동학에 대해서도 그 조직과 농민운동의 결합, 운동의 전개 등을 서술하고 유생으로서의 비평을 더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 3대 지도자의 재봉기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실제로도 7월 말에서 8월 초경 불타버린 고부 조소리의 옛집 대신 태인 동골에 새 거처를 마련하고, 후처를 맞아 평범한 생활을 보냈다. 이에 전봉준도 9월 8일경에는 식량이나 전투에 필요한 물품들을 확보하기 시작하는 등 재봉기 준비에 착수했다. 이러한 태도 변화에는 8월 말 남원에서 전봉준과 김개남이 주야 8일간에 걸친 비밀회의를 한 것과, 이 무렵 삼남 각처의 양반, 보부상뿐 아니라 농민군까지 다 같이 일어나 종묘사직을 위협하는 일본군과 그와 결탁한 개화파를 치라는 취지의 대원군의 밀지가 전달된 것이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후일 재판 과정에서도 전봉준은 다시 봉기한 이유에 대해, “일본이 개화라 칭하면서 처음부터 일언반구도 민간에 전하지 않고 또 격서도 없이 군대를 이끌고 우리 도성에 들어와 밤중에 왕궁을 깨고 쳐들어가 주상을 놀라게 하였기로, 초야의 사민들이 충군애국의 마음으로 강개함을 이기지 못해 군대를 규합하여 일본인과 접전하여 이 사실을 일차로 묻고자” 한 것이라고 대답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