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의 제4대(재위: 1418년~1450년) 왕.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라벤더 그레이 Lavender Gray
콜로니얼 옐로 コロニアルイエロー, Colonial Yellow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양력 5월 15일 생일 역사 인물
전체 2명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집현전 설치와 인재 양성
집현전(集賢殿)은 세종대 정치·사회적 안정과 문화적 발달에 있어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던 기관이었다. 집현전은 원래 중국에서 연원한 것으로, ‘집현전’이 처음 등장한 것은 당(唐)나라 때이며, 송(宋)나라에서도 당의 제도를 따라 집현전을 설치하였다. 우리나라에서는 고려 시대에 집현전이 처음 설치되었으며, 조선 초기 정종대에도 설치된 바가 있었다. 하지만 당시의 집현전은 유명무실한 기구에 그쳤으며, 명실상부한 학술 기관으로서의 집현전이 등장한 것은 세종대에 이르러서였다. 세종은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성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학술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였다. 세종대에 집현전이 설치된 것은 1420년(세종 2) 3월이다. 설치 초기 집현전은 주로 경연(經筵)과 서연(書筵)에서 국왕·세자와 함께 유가(儒家) 경전(經傳)과 역사서를 읽고 토론하는 업무를 담당하다가, 1428년(세종 10)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학술 연구 사업을 수행하였다. 집현전에서의 학술 연구는 고제(古制) 연구와 서적 편찬 사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고제 연구는 조선의 상황에 맞는 유교적 의례(儀禮)·제도를 확립하기 위해 중국과 우리나라의 역대 제도를 연구하는 것으로, 예조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 집현전 등을 중심으로 연구가 추진되었다. 집현전에서 편찬된 서적은 약 40종에 달하며, 연구 분야도 유학(儒學)이나 의례에만 국한되지 않고 정치·역사·문학·어학·군사·지리·의학·농업·천문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으며, 이들이 장기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로, 집현전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政務)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훈민정음의 창제
훈민정음(訓民正音)의 창제는 세종이 남긴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빛나는 업적이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崔恒)·박팽년(朴彭年)·신숙주(申叔舟)·이현로(李賢老)·이개(李塏)·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이 과정에서 최만리(崔萬理)·김문(金汶) 등이 새 문자의 창제에 강하게 반대했지만, 세종은 이러한 반대를 물리치고 더욱 적극적으로 훈민정음의 반포를 주도해 나갔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훈민정음은 새로운 문자를 만든 목적과 각 문자의 의미 등을 상세히 설명한 해례(解例)를 갖추고 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훈민정음 반포 이후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예악(禮樂)과 법제(法制)의 정비
성리학의 사상적 기반 위에서 건립된 조선은 유교적 예악정치(禮樂政治)의 실현을 추구하였다. 여기에서 ‘예(禮)’는 사회적 질서를 의미하고 ‘악(樂)’은 조화를 의미한다. 즉,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사회적 지위에 맞는 분수와 질서를 지키면서 살지만 그 가운데 상하 간의 조화를 이루어 가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예와 악의 정신이 구체적으로 발현되는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필요하다. 따라서 유교 정치의 실현을 추구했던 세종대에 국가 의례와 음악의 정비가 추진된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국가 의례의 정비는 새 나라 조선의 위상에 걸맞는 의례의 제도를 확정하는 것으로 태종대 의례상정소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고 세종대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과학 기술의 발전
세종대에는 천문, 의학, 농업 등 과학 기술 분야에서도 큰 발전을 이루었던 시기였다. 먼저 천문 분야를 살펴보면, 세종은 1432년(세종 14)부터 장영실(蔣英實)·이천(李蕆) 등에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각종 천문 관측 기계들을 제작하게 하여 1438년(세종 20)에 모두 완성하였다. 그리고 1434년(세종 16)에는 경복궁 안에 석축 간의대(簡儀臺)를 축조하고 이곳에 관측 기계들을 비치하여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1434년(세종 16)에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測雨器)가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가 마련되었다. 의학 분야에서 세종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학사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연구하게 하여, 2년 만에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또, 1445년(세종 27)에는 역시 집현전에 명하여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집성한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공법(貢法) 시행과 북방 개척
세종은 민생 안정을 위한 여러 가지 정책들을 추진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공법(貢法)의 시행이다. 공법 이전에는 관리가 매년 풍·흉작을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했으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관의 부정으로 폐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개정한 것이다. 세종은 1436년(세종 18)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였다. 공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기본 세율을 1/20로 하는 것을 기본 골자로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불우한 가정사와 질병의 고통
이상과 같이 찬란한 업적을 남긴 세종이었지만, 세종 개인의 삶에는 많음 슬픔과 고통이 있었다. 먼저 즉위 초반 장인 심온이 처형되고 처가가 풍비박산되는 비극을 겪었다. 당시 영의정이던 심온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경계한 태종이 상왕의 군사권 행사에 이견을 보였던 강상인(姜尙仁) 등을 처벌하는 과정에서 그 배후로 심온을 지목하여 처형한 것이다. 태종은 세종의 왕권을 위협할 만한 세력을 제거하기 위한 조처였지만, 세종에게는 처가를 잃는 아픔이었다. 세종은 사랑하는 자식과 아내를 먼저 잃는 아픔도 겪었다. 이와 같은 세종의 질병은 그가 정치 체제를 의정부 서사제로 전환하고 세자에게 정무를 대리하도록 했던 중요한 이유 중 하나였던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