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고려 전기에, 서북면행영도통사, 상원수대장군, 문하시중 등을 역임한 문신.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에버그린 Evergreen
헬리오트로피움 ヘリオトロープ, Heliotropium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머리말
강감찬은 고려현종[고려](顯宗)대(顯宗代)에 활약한 중신으로, 11세기 초반 거란과의 전쟁을 성공적으로 끝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정치가이다. 거란군에게 큰 승리를 거둔귀주대첩(龜州大捷)으로 유명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2차 고려-거란 전쟁의 발발과 피난 건의
강감찬이 주목할 만한 정치적 활동을 펼치는 모습은 현종대(顯宗代)의 기록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 1010년(현종 원년)에 거란의 침입으로 발발한 2차 고려-거란 전쟁 초기의 일이다. 우선 당시의 시대 상황에 대해 간략히 살펴보자. 993년(성종 12)에 벌어졌던 첫 번째거란의 고려 침입이서희(徐熙)의 협상으로 원만히 마무리된 뒤, 고려와 거란의 관계는 일단 안정되었다. 압록강을 경계로 양국의 영역을 나누고 고려가 송이 아닌 거란과 사대 관계를 맺는 조건으로 얻은 평화였다. 그러나 거란과 송, 고려가 맞닿아 있는 상황에서, 이 평화의 시간은 그리 길 수 없었다. 그러나 바로 이 때 강감찬이 등장하여 분위기를 바꾸었다. 강감찬의 건의를 채택하여 현종은 피난길에 올랐다.지채문(智蔡文)등 극소수의 신하들만이 뒤를 따른 고생스러운 피난길이었으나, 이를 통해 거란군의 매서운 기세를 피하고 시간을 끄는 데에 성공할 수 있었다. 전쟁 기간 동안 강감찬의 모습은 사료에 나타나지 않아 궁금증을 일으킨다. 그러나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피난을 건의한 공을 크게 인정받았다. 훗날 그가 재상의 지위에 해당하는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로 임명될 때, 현종은 직접 임명장을 쓰면서 강감찬의 계책 덕분에 온 나라가 야만인이 되는 것을 면할 수 있었다고 치하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활발한 정치적 활동과 3차 고려-거란 전쟁 지휘
2차 고려-거란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승진을 거듭하며 순탄한 벼슬길을 걸었다. 1011년(현종 2)에 국자좨주(國子祭酒)를 거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좌산기상시(左散騎常侍)로 옮겼으며, 중추사(中樞使)로 승진하였다. 이어 이부상서(吏部尙書)를 맡게 되었다. 이러한 중앙 관직뿐만 아니라, 동북면행영병마사(東北面行營兵馬使)를 역임하여 거란과의 갈등 상황에 대비하는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이 시기에 강감찬은 사직단(社稷壇)을 수리하고 예관(禮官)에게 그 제사의 의례를 논의하여 정하게 하자는 건의를 올리는 한편, 자신의 밭을 군호(軍戶)에게 나누어 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하는 등의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 1018년(현종 9)에는 드디어 서경유수(西京留守)·내사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內史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라는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현종은 이에 맞서 강감찬을 상원수(上元帥)로, 대장군강민첨(姜民瞻)을 부원수(副元帥)로 삼아 군사 20만 8천 3백 명을 거느리고 거란군을 상대하도록 명령하였다. 강감찬은 먼저 기병 1만 2천 명을 뽑아흥화진(興化鎭)근처의 산골짜기에 매복시키고, 성 동쪽의 큰 냇물을 소가죽을 엮어 막아둔 채로 거란군을 기다렸다. 이에 강감찬은 개경의 수비를 강화하기 위해김종현(金宗鉉)에게 군사 1만을 거느리고 급히 개경으로 가서 합류하게 하였다. 또한 동북면 병마사도 3천 3백의 병력을 개경으로 보내 방어를 강화하였다. 하지만 강감찬은 이들을 그대로 돌려보내지 않았다. 연주(漣州)와 위주(渭州) 일대에서 거란군을 요격하여 5백 명 이상의 목을 베고, 마침내 귀주 일대의 평야에서 거란군과 전면전을 개시하였다. 이 전투를 보통 귀주대첩이라 부른다. 대승을 거둔 강감찬은 국왕 현종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과 고려군을 직접 영파역(迎波驛)까지 나아가 맞이하며 크게 잔치를 열어주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만년의 활동
전쟁이 끝난 뒤 강감찬은 나이가 많다는 이유로 사직을 요청하였다. 그러나 현종은 이를 허락하지 않고 사흘에 한 번만 조회에 나오게 하는 등의 특전을 베풀며, 검교태위(檢校太尉) 문하시랑동내사문하평장사(門下侍郞同內史門下平章事)·천수현개국남(天水縣開國男)·식읍삼백호(食邑三百戶)로 봉하고 추충협모안국공신(推忠協謀安國功臣)으로 삼았다. 1020년(현종 11)에 강감찬은 다시 사직을 청하였고, 이에 현종은 사직을 허락하며 그를 특진검교태부(特進檢校太傅)·천수현개국자(天水縣開國子)·식읍오백호(食邑五百戶)로 올려주었다. 그러나 사직 후에도 정치계를 완전히 떠난 것은 아니어서, 이후에도 강감찬은 개경에 성곽이 없으니나성(羅城)을 쌓자고 건의하는 등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1030년(현종 21)에는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임명되었고, 현종의 뒤를 이어 즉위한덕종[고려](德宗)은 강감찬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추충협모안국봉상공신(推忠協謀安國奉上功臣)으로 삼고 특진검교태사(特進檢校太師)·시중(侍中)·천수군개국후(天水郡開國侯)·식읍일천호(食邑一千戶)로 올려주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관련 유물·유적 및 설화
강감찬과 관련된 유적지로는 우선 서울특별시 관악구에 있는낙성대(落星垈)를 들 수 있다. 이 지역은 강감찬이 출생했다는 곳으로, 낙성대는 강감찬을 모신 사당이다. 그가 출생할 때 별이 떨어졌다는 설화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이곳에는 고려 시대에 세워진 3층 석탑이 있는데, 강감찬 생가터로 알려진 곳에 있던 것을 옮겨온 것이다. 전설에 따르면 임진왜란 때에 왜군이 탑의 기운을 빼기 위해 탑과 그 일대를 훼손하고 그 안에 있던 보물을 빼갔다고 한다. 한편, 『고려사』에도 그의 출생에 관한 설화가 수록되어 있다. 이 아이를 개경으로 데리고 돌아와 길렀으니 바로 강감찬인데, 훗날 송에서 온 사신이 그를 보고 문곡성(文曲星)이 현신한 것이라고 절하였다고 하였다. 강감찬의 문집으로 『낙도교거집(樂道郊居集)』과 『구선집(求善集)』이 있었다고 하나 지금은 모두 전하지 않는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