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고려 전기, 제1대 왕.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셀러던 그린 Celadon Green
홍등색 紅藤色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개요
지금의 개성(開城)인 송악(松嶽)의 호족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처음에는 후고구려를 세운 궁예(弓裔)의 부하로 있다가 그를 제거하고 왕위를 차지하여 918년(태조 원년)에 고려를 세웠다. 이후 후삼국 시대의 전란 속에서 신라의 항복을 받고, 이어 견훤(甄萱)이 세운 후백제를 무력으로 꺾어 936년(태조 19)에 통일을 달성하였다. 그의 아버지는 용건(龍建; 이후 왕융으로 개명)이며 어머니는 위숙왕후(威肅王后)로 추봉된 한씨(韓氏)였다. 29명의 부인을 두었고, 그 사이에서 26명의 왕자와 9명의 공주를 자녀로 얻었다. 능은 현릉(顯陵)이며, 시호는 신성(神聖)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송악 출신의 젊은 호족, 궁예의 휘하로 들어가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꺾고 한반도의 통일을 이룬 것은 668년(문무왕 8)의 일이었다. 이로부터 시작된 통일신라는 8세기 중반을 지나며 점차 혼란에 빠져들었다. 중앙의 귀족들이 왕위와 권력을 둘러싸고 극심한 권력 투쟁에 돌입했고, 시간이 흐를수록 백성들의 삶은 피폐해졌다. 이에 전국적으로 조세 납부를 거부하는 현상이 발생하였으며, 지역별로 유력자들을 중심으로 단결하여 경주(慶州)의 신라 조정에서 이탈하는 경향이 급속도로 심해졌다. 이러한 유력자들을 호족(豪族) 혹은 성주(城主)·장군(將軍)이라 통칭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왕건, 궁예 군을 이끌고 전장을 누비다
궁예는 자신의 휘하로 들어온 젊은 왕건을 중용했다. 『고려사』와 『고려사절요』에 따르면 900년(효공왕 4)에 궁예는 왕건에게 군의 지휘를 맡겨 경기도 남부와 충청도 북부 지역을 공략하도록 하였고, 왕건은 그 기대에 부응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광주(廣州)·충주(忠州)·청주(靑州)·당성(唐城)·괴양(槐壤) 등의 군현을 성공적으로 공략한 왕건에게 궁예는 아찬(阿湌)을 제수하여 포상하였다. 궁예는 왕건에게 계속 중요한 임무를 맡겼다. 903년에 왕건은 수군을 이끌고 바다를 통해 후백제의 후방 깊숙이 위치한 금성군(錦城郡)을 공략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지금의 나주(羅州) 지역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궁예를 축출하고 고려를 건국하다
그러나 권력과 정치의 세계는 냉정한 법이다. 당시의 상황에 대해 『고려사절요』에서는 “태조가 궁예의 교만함과 포학함을 보고는 다시 뜻을 변방에 두었다.”라고 기록하였다. 또한 세운 공에 비해 포상이 적다고 불평하는 부하들에게 “삼가하고 태만하지 말라. 오로지 힘을 합하고 다른 마음을 품지 않는다면 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주상께서 무고한 사람을 많이 죽이고, 참소하고 아첨하는 자들이 뜻을 얻어 조정 안에 있는 사람들은 스스로를 보전하지 못하니, 조정 밖에서 정벌에 종사하면서 힘을 다하여 왕을 보필하는 것만큼 나은 것이 없다.”라고 하였다고 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왕건과 견훤, 한반도의 패권을 두고 겨루다
이제 한반도의 판도는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가 자웅을 겨루는 형세로 바뀌었다. 8월에 후백제에서 고려에 보낸 즉위 축하 사신이 돌아간 지 채 두 주도 지나지 않아, 웅주(熊州)·운주(運州) 등 10여 지역이 고려를 버리고 후백제로 붙었다. 긴장의 시작이었다. 920년(태조 3) 10월에 고려와 후백제는 신라를 사이에 두고 갈등을 빚었다. 후백제가 신라를 공격하자 신라는 고려에 구원을 요청했고, 고려가 이에 응하자 후백제가 고려를 적대시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후 두 나라는 일시적으로 화친을 맺기도 하나, 강한 군사적인 충돌을 이어갔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최후의 승자 왕건, 한반도를 통일하다
이후의 기록을 읽다 보면, 갑자기 반전이 벌어진다. 929년(태조 12) 12월, 왕건은 견훤에게 포위된 고창군(古昌郡), 즉 지금의 안동(安東) 지역을 구원하기 위해 병력을 이끌고 몸소 출정하였다. 유금필(庾黔弼)의 분전으로 포위를 뚫고 고창으로 들어간 고려군은 이듬해 1월, 8천여 명을 죽이는 대승을 거두고 견훤을 도주하게 하였다. 비결은 무엇이었을까? 바로 현지의 호족들인 김선평(金宣平)·권행(權行)·장길(張吉)의 협력 덕분이었다. 이후 영안(永安) 등 30여 군현이 투항하고, 다음 달에는 강원도와 경상도 일대의 110여 성이 고려로 붙었다. 고려 쪽으로 운명의 흐름이 바뀌는 순간이었다. 이렇게 하여 40년 가까이 계속되었던 후삼국의 쟁패는 끝이 나고, 고려가 통일을 이루어 한반도의 유일한 패자로 올라섰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새 나라의 기틀을 세우다
후대에 벌어진 거란과의 전쟁에서 개경이 점령되면서 국초의 기록이 크게 사라져, 통일 후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서는 기록이 극히 소략하다. 그가 신하들에게 내렸다는 「정계(政誡)」와 「계백료서(誡百寮書)」는 그 이름으로 보아 신하들의 기강을 세우기 위한 것으로 추정된다. 또 후대의 왕들을 위해 「훈요십조(訓要十條)」를 남겨 통치의 주요 방향을 제시하였다. 왕건은 즉위 이후부터 민생을 안정시키고 국가의 기틀을 잡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세금을 1/10로 감면해 주었고, 서경(西京)에 학교를 세웠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사람들을 풀어주고 호족들이 백성들을 침탈하지 못하도록 경고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