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 전기에, 예조참판, 이조판서, 우의정 등을 역임한 문신.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애프리콧 Apricot
아쿠아 그레이 アクアグレイ, Aqua Gray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태조~태종대의 관직 활동
1386년(우왕 12) 문과 급제에 급제한 맹사성은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에 임명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으며, 이후 전의시승(典儀寺丞)·기거사인(起居舍人)·우헌납(右獻納)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1392년(태조 1) 조선이 건국된 후에는 수원판관(水原判官), 면천 군수(沔川郡守) 등의 외직(外職)을 거쳤으며, 다시 내직으로 복위하여 내사사인(內史舍人)에 임명되었다. 맹사성은 37세 때인 1396년(태조 5)에 예조의랑(禮曹議郞)에 임명되었다가 정희계(鄭熙啓)의 시호(諡號) 문제로 탄핵을 받았다. 이에 대해 태조는 봉상시에서 국가의 원훈(元勳)인 정희계의 시호를 박하게 정한 것을 질책하면서 봉상시 관원들을 국문하도록 지시했고, 형조에서는 봉상시의 잘못을 지적하지 않은 책임을 물어 맹사성을 비롯한 예조 관원들을 탄핵하였다. 그 결과 맹사성은 조사수(趙士秀) 등 예조의 동료 관원들과 함께 파직되었다. 파직 후 3년 정도 관직에서 벗어나 있던 맹사성은 1399년(정종 1) 9월경에 우간의대부(右諫議大夫)로 복직하였다. 하지만 복직하자마자 문하부(門下府)의 관원들이 모두 탄핵을 받는 사건이 일어나면서 다시 파직될 위기에 처했으나, 맹사성은 일을 맡은 지 며칠 되지 않았다는 점이 고려되어 파직을 면하였다. 이후 맹사성은 간의우산기상시(諫議右散騎常侍)·간의좌산기상시(諫議左散騎常侍) 등을 역임한 다음 외직으로 나가 공주목사(公州牧使)를 거쳐 1403년(태종 3) 윤11월 우사간대부(右司諫大夫)로 내직에 복귀하였다. 1405년(태종 5) 동부대언(同副代言)으로 복직한 맹사성은 좌부대언(左副代言)을 거쳐 이조참의에 임명되었다. 사행에서 돌아온 후 맹사성은 한성윤(漢城尹)과 우부빈객(右副賓客)을 거쳐 1409년(태종 9) 11월에는 사헌부대사헌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맹사성은 대사헌에 임명된 지 한 달 만에 일어난 ‘조대림 사건’으로 인해 최대의 위기를 맞이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세종대의 관직 활동
맹사성의 태조~태종대 관직 생활이 파직·면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때로는 죽을 고비까지 맞이했던 고난의 시간이었던 것에 비해 세종대의 관직 활동은 대체로 순탄했다고 할 수 있다. 맹사성은 60세가 되던 1419년(세종 1)에 이조판서(吏曹判書)와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 예문관 대제학(大提學) 등을 차례로 거친 후, 이듬해(1420)에 다시 이조판서에, 1421년(세종 3)에는 의정부 찬성사(議政府贊成事)에 임명되었다. 1422년(세종 4)에는 허조(許稠) 등과 함께 육전수찬색(六典修撰色)의 제조(提調)가 되어 『신속육전(新續六典)』 편찬 작업에 참여하였다. 68세 때인 1427년(세종 9) 맹사성은 우의정에 임명되어 좌의정 황희(黃喜)와 함께 의정부의 각종 업무들을 총괄하였다. 또, 맹사성은 의례상정소(儀禮詳定所)의 제조를 겸임하면서 중국과 우리나라의 고제(古制) 연구 및 이를 바탕으로 한 새로운 제도·문물 정비 사업 추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1430년(세종 12)에 맹사성은 황희와 함께 『태종실록(太宗實錄)』의 감수 임무를 수행하였다. 이에 대해 맹사성은, 세종이 실록을 보게 되면 후대의 왕들도 반드시 이를 전례로 삼아 실록을 볼 것이고 더러는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을 고치려는 경우도 생길 것이며, 그렇게 되면 사관(史官)이 두려운 마음이 생겨서 사실을 공정하게 기록할 수 없게 될 것이라고 하면서 반대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이후 맹사성은 1431년(세종 13) 9월 좌의정으로 승진하였으며, 이듬해(1432) 1월에는 권진(權軫)·윤회(尹淮)·신장(申檣) 등과 함께 『세종실록지리지(世宗實錄地理志)』를 찬수하였다. 1435년(세종 17) 2월, 76세의 노재상(老宰相) 맹사성은 좌의정으로 치사(致仕)함으로써 49년간의 관직 생활을 마감하였다. 맹사성은 치사한 지 3년 후인 1438년(세종 20) 10월에 79세를 일기로 서거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음악가 맹사성
『세종실록』에 수록된 맹사성의 졸기에는 맹사성이 음률(音律), 즉 음악에 조예가 깊었으며 자신이 직접 악기를 제작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서거정(徐居正)이 지은 『필원잡기(筆苑雜記)』에도 맹사성이 음률을 잘 알았으며 항상 피리를 가지고 다니면서 날마다 서너 곡조씩 연주했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상의 내용들은 맹사성의 음악에 대한 지식과 재능이 상당히 뛰어났음을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맹사성은 의례상정소의 제조로서 각종 문물·제도와 국가 의례(儀禮)를 정비하는 과정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 중에서도 특히 맹사성이 남보다 특출한 전문성을 지녔던 분야는 바로 음악이었다. 맹사성의 음악적 재능은 이미 태종대부터 인정받았다. 1411년(태종 11) 윤12월 맹사성이 판충주목사(判忠州牧使)로 외직에 나가게 되자 예조에서 이에 반대하면서 맹사성을 내직에 두어 정악(正樂)을 가르치도록 할 것을 건의한 일이나, 1412년 풍해도도관찰사(豐海道都觀察使)에 제수되었을 때 하륜(河崙)이 오음(五音)을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이는 오직 맹사성밖에 없다고 하면서 그에게 정악(正樂) 교습 임무를 맡길 것을 주장한 일 등은 그의 음악적 능력이 당시에 이미 공인되었음을 보여준다. 이에 따라 맹사성은 태종대에 관습도감(慣習都監)의 제조를 맡아 영인(伶人)에게 새로 지은 사곡(詞曲)을 가르쳤는데, 그 결과가 좋아서 태종이 매우 흡족해 했다고 한다. 맹사성의 음악가로서의 경륜이 크게 발휘된 것은 세종대였다. 이 과정에서 맹사성은 국가의 음악 교육과 연구를 담당하던 악학(樂學)의 최고 책임자인 영악학(領樂學)으로 활동하며 전반적인 사업 추진을 총괄하였다. 세종은 박연이 추진하는 국가 음악 정비가 지나치게 이론 중심으로 진행되거나 중국의 아악(雅樂)으로 치우치는 경향이 나타나자 이를 경계하면서, 맹사성이 이를 조절해 주기를 바랐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