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조선전기 성균관대사성, 대제학, 지경연 등을 역임한 문신. 학자.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퍼 Fir
패럿 그린 パロットグリーン, Parrot Green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양력 1월 13일 생일 역사 인물
전체 2명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조선의 영원한 스승
이황(李滉)은 인간 심성론에 대한 연구와 강학(講學)을 통해 조선 성리학(性理學)의 수준을 격상시킨 학자로 평가받는다. 기대승(奇大升)과의 논쟁은 조선 전역으로 파급되어 성리학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으며, 향약 제정과 서원 건립은 성리학적 정치관이 곳곳에 퍼질 수 있도록 하였다. 그의 인품과 처세 또한 동시기 여러 지식인들의 존경을 받았고 후세 학자들에게도 좋은 모범이 되었다. 또한 그의 문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된 남인(南人)은 조선 후기 정치의 큰 축으로 활동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사화의 시대
퇴계 이황이 태어난 16세기 조선 정치는 사화(士禍)로 인해 매우 혼란했다. 전반적으로 본다면 의리(義理)와 도학(道學)을 내세운 새로운 정치집단인 사림(士林)이 정계 전반으로 진출하는 과정이었기 때문에 새로운 정치 질서가 점차 태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기존의 기득권 세력인 훈구파(勳舊派)의 반발은 매우 거셌다. 이러한 반발은 결국 사림이 큰 피해를 입은 사화로 드러났다. 1498년(연산군 4) 첫 사화가 벌어졌다. 1545년(명종 즉위)에는 명종[조선](明宗)의 외삼촌 윤원형(尹元衡)과 인종[조선](仁宗)의 외삼촌 윤임(尹任) 등 외척 세력의 대립으로 을사사화(乙巳士禍)가 벌어져 또다시 사림파 인물들이 해를 입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무신 집안의 막내 아들
아이러니하게도 조선의 스승인 이황은 무신 집안에서 태어났다. 퇴계의 선대는 진보(眞寶)에 살았으므로 본관을 진성(眞城)이라 하였다. 이황의 6대조 이석(李碩)은 진보현의 아전으로 있다가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5대조 이자수(李子修)는 고려조에 관직이 판전의사사(判典儀寺事)에 이르렀는데, 특히 홍건적 토벌에 무공을 세워 송안군(松安君)에 봉해졌다. 또한 그는 왜구의 침략을 피해서 진보에서 안동(安東) 주촌(周村)으로 이사하여 살기 시작했다. 이는 이황의 가문이 안동과 인연을 맺게 된 계기가 된다. 이황의 고조부 이운후(李云候)는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을 지내고 사복시정(司僕寺正)에 추증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도학에의 정진
이황은 1501년(연산군 7) 11월 25일 경상도 예안현 온계리에서 태어났다. 부친 이식은 본래 의성 김씨에게 장가를 들었으나, 의성 김씨는 2남 1녀를 두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춘천 박씨에게 다시 장가들어 아들 다섯을 두었으니, 그 막내가 바로 이황이다. 그러나 이황이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부친 이식이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이황의 친모 춘천 박씨는 졸지에 장가든 첫째를 빼고도 6남 1녀에 달하는 자녀들을 떠맡아야 하는 처지가 된 것이다. 그러나 박씨는 오히려 자녀들의 교육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박씨는 농사와 양잠에 힘을 써서 가세가 기울어지지 않도록 노력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혼탁한 벼슬길에서 고군분투하다
퇴계 이황은 1534년(중종 29)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올랐다. 이후 49세 사직서를 제출한 시기까지 이황은 벼슬살이에서도 그 학문과 인품으로 성공한 축에 속했다. 그러나 사화가 이어지는 혼란스러운 시기였기 때문에, 이황의 벼슬길이 처음부터 순탄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황의 장인인 권질(權礩)은 정언(正言) 권전(權磌)의 형이었는데, 권전은 기묘사림으로 기묘사화 당시 파직된 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獄事)에 연루되어 죽었다. 결국 을사사화가 일어나 여러 선비들이 희생되었으며, 이황 또한 을사사화를 주도한 이기(李芑)의 계략으로 인해 관직이 잠시 삭탈되기도 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도산에 깃들다
이황은 결국 고향에 은거하면서 지방에서 제자를 기르는 방법을 택하였다. 병으로 감사에게 수차례 사직 의사를 표명하고 답을 기다리지도 않은 채 고향으로 돌아왔다. 1550년(명종 5) 2월 비로소 퇴계(退溪) 서쪽에 자리를 잡았다. 그러나 귀향과 은거의 기쁨도 잠시, 혼탁한 중앙정계의 물길은 이황의 가문에게도 몰려왔다. 가장 친했던 넷째 형 이해가 당시의 권력자 이기의 모함에 빠져 곤장을 맞고 귀양 가던 길에 죽고 말았던 것이다. 중앙 정계를 떠나고자 한 이황의 선택은 옳은 것으로 판명되었으나, 형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 할 수밖에 없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