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요약
고려 후기에, 문하찬성사, 예문관제학, 인물추변도감 제조관 등을 역임한 문신.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퍼 Fir
패럿 그린 パロットグリーン, Parrot Green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양력 1월 13일 생일 역사 인물
전체 2명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개요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로 시작하는 단심가(丹心歌)의 저자 정몽주(鄭夢周). 명운이 다해가는 고려왕조를 위해 목숨을 바쳤던 그는 오늘날 한국인들에게 충신의 대명사로 회자되고 있다. 정몽주가 활약하던 시기 고려는 정치·사회·문화 전반에 걸쳐 급격한 변화를 직면하고 있었다. 정치적으로 중국대륙을 지배해오던 원(元)이 쇠락하고 신흥 왕조 명(明)이 대두함에 따라 국제질서가 재편되었고, 이러한 흐름에 발맞추어 고려 내부에서는 국정을 쇄신하려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하늘이 내린 신동, 고려 중앙정계에 진출하다
충숙왕(忠肅王) 복위 후 6년째가 되던 해인 1337년, 정몽주는 정운관(鄭云瓘)과 영천(永川) 이씨의 아들로 태어났다. 『고려사(高麗史)』에 수록된 정몽주 열전에서는 그의 세계(世系)와 관련하여 고려중기 명신(名臣) 정습명(鄭襲明)의 후손이라는 사실만을 기록할 뿐, 할아버지나 외할아버지와 같은 가까운 선조에 대해 어떠한 정보도 전해주지 않는다. 아버지 정운관의 행적이나 관력(官歷) 또한 사료를 통해 확인할 수 없다. 이로부터 미루어볼 때 정몽주는 오랜 기간 중앙의 고관(高官)을 배출하지 못한 한미한 가문 출신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정몽주의 자는 달가(達可), 호는 포은(圃隱)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동방이학(東方理學)의 신기원을 열다
신진세력 육성을 위해 교육제도를 개편한 공민왕은 1367년(공민왕 16)에 성균관을 재건하고 이색(李穡)으로 하여금 성균대사성(成均大司成)을 겸직하게 하였다. 이에 이색은 김구용(金九容)·박상충(朴尙衷)·박의중(朴宜中)·이숭인(李崇仁) 등 학문적 역량이 뛰어난 인물들에게 교관(敎官)을 겸직시켰는데, 예조정랑(禮曹正郞)을 지내던 정몽주 또한 발탁되어 성균박사(成均博士)가 되었다. 이로써 정몽주는 고려말 유학계의 핵심인물로 거듭난다. 당시 고려에 전래된 경서(經書)는 『주자집주(朱子集註)』가 유일했기 때문에 중국의 선진학문인 성리학(性理學)을 국내에서 연구하기란 쉽지 않았다. 이후 호병문(胡炳文)의 『사서통(四書通)』이 고려에 들어오자 유학자들은 비로소 그의 우수성을 알고 감탄하게 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고려말 대외교섭을 책임지다
『고려사』는 “명이 건국되자 정몽주의 강력한 요청에 따라 고려가 가장 먼저 귀부하였다”는 기사를 수록하여 고려와 명의 관계가 시작되는 데에 정몽주의 공이 컸음을 전해주고 있다. 실제로 정몽주는 고려가 근본적으로 변화하기 위해 원과의 관계를 끊고 명과 통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는 대명외교(對明外交)를 개시하는 단계뿐 아니라 양자의 관계를 지속하는 과정에서도 막대한 영향력을 발휘하였다. 1372년(공민왕 21)에 사신 홍사범(洪師範)의 서장관(書狀官)으로 임명된 정몽주는 명에 들어가 촉(蜀) 지역이 평정된 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이로써 일본에 파견된 정몽주는 고려와 일본의 이해관계를 논리적으로 설명해 일본의 정치인들을 설득하고, 왜구 방지에 적극적으로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얻어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이성계와 정몽주, 공조와 이반의 갈림길에 서다
애초 이성계와 정몽주는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1364년(공민왕 13)에 정몽주와 함께 삼선(三善)·삼개(三介) 세력을 제압한 이후 이성계는 그를 신임하여 전쟁터에 나갈 때마다 그를 데리고 갔고, 기회가 주어질 때마다 그를 천거하였다. 정몽주 또한 이성계 세력이 갖는 문제의식에 동조하였다. 온갖 폐단의 온상이었던 불교를 비판하거나 명과의 통교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그는 윤소종·정도전 등 이성계 세력의 핵심인물들과 뜻을 같이 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역사의 아이러니 : 이방원, 정몽주를 칭송하다.
태종(太宗) 이방원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정몽주를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에 추증하였다. 이는 권근의 제안으로 이루어진 조치였으나, 정몽주 암살의 주범인 이방원이 친히 정몽주를 추증하였다는 것은 분명 현대인의 상식 속에서 쉽게 납득되지 않는 일이다. 사실 정몽주 추증에 숨겨진 정치적 의도는 태종 즉위기의 시대적 분위기를 종합적으로 검토해보아야 해명할 수 있다. 이방원이 왕위에 오르던 시점에 신흥왕조 조선은 어느 정도 안정기로 접어들고 있었다. 권근과 같이 고려 말에 이성계와 반대 노선을 걸었던 인물들이 조선에 출사하였고 왕실의 정통성 또한 전사회적으로 인정되고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