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MON · 26.11.02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대한제국 고종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대한제국 고종

高宗
조선 후기국왕
시대조선 후기
직군국왕
양력 생일1852년 9월 8일
향년66세
Birth Color
이트러스캔 레드 (Etruscan Red)
#A25F57
Second Color
아쿠아마린 (アクアマリン, Aquamarine)
#67B5B7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33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6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의 제26대(재위: 1863년~1907년) 왕.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처녀자리
별자리 주간처녀자리Ⅱ: 수수께끼의 주간
탄생성수성
탄생신헤르메스
Terrestrial

땅

꽃말깨어남 · 담대한 선택 · 매운 생명력 · 선명한 결단
탄생목수양버들
탄생석사파이어
Spirit

그 외

탄생주블루 문
탄생색 (영문판)이트러스캔 레드 (Etruscan Red)
탄생색 (일어판)아쿠아마린 (アクアマリン, Aquamarine)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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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일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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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즉위와 수렴청정

고종(高宗)은 영조(英祖)의 현손(玄孫) 흥선군(興宣君) 이하응(李昰應)의 둘째 아들로 어머니는 여흥부대부인 민씨(驪興府大夫人 閔氏)이다. 철종(哲宗) 3년(1852) 7월 25일 흥선군의 사저 청니방(靑泥坊)에서 출생하였다. 아명은 명복(命福), 초명은 재황(載晃)으로 , 어려서부터 비범하였다고 전한다. 철종 14년(1863) 12월 8일 조선의 25대 임금인 철종이 승하하자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는 아버지 대원군과 순조(純祖)의 세자, 익종(翼宗)의 비(妃)인 조대비(趙大妃, 신정왕후神貞王后) 사이의 정치적 밀약의 산물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친정과 개항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실권을 쥐고 국정을 운영해 가는 가운데 고종은 장성하여 22세의 청년이 되었으며 친정(親政)을 원했다. 여전히 국정은 대원군을 비롯한 친대원군 인사들이 장악하고 있는 가운데 1873년 10월 25일과 11월 3일에 걸쳐 경복궁 중건과 서원 철폐, 청국 화폐 수입 등 대원군이 취한 일련의 정책에 따른 경제적 혼란과 사회적 폐단을 비판하는 최익현(崔益鉉)의 상소 를 계기로 대원군은 하야했으며, 이에 친정을 선포하였다. 고종은 친정과 더불어 원자(元子)를 얻는 기쁨도 맛보았다. 친정을 선포한 직후인 1874년 2월 8일 왕후와의 사이에서 원자, 바로 순종(純宗)이 탄생한 것이다. 1875년 8월 20일(음력) 일본군함 운요호(雲揚號)가 강화도에 정박, 식수 보급을 명목으로 침입해 들어온 것에 대하여 조선의 수군이 포격을 가하자, 이에 운요호에서도 초지진(草芝鎭)에 포격을 가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를 빌미로 일본은 통상을 요구하였고 1876년 2월 2일 강화도 연무당(鍊武堂)에서 전권대신 신헌(申櫶)과 일본측 전권변리대신 쿠로다 기요카다(黑田淸隆) 사이에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일명 ‘강화도 조약’)가 체결되었다. 12개조로 이루어진 이 조약은 부산에 이어 인천, 원산의 추가 개항을 약속한 한편 관세에 대한 규정이 없고, 치외법권을 인정함은 물론 조선의 해안선에 대한 측량을 허용하는 등 조선에 불리한 다수의 조항들을 포함하고 있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왕권에 대한 도전들 -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개항과 잇따른 개화정책은 급격한 변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개항에 의해 조선의 시장은 조선의 의지와 상관없이 자본주의 세계경제체제에 편입되었으며, 개화정책에 따라 과거에는 찾아 볼 수 없었던 새로운 양상들을 연출하였으며, 이는 정치적․사회적 혼란을 야기하였다. 그 시작을 알리는 사건이 바로 임오군란(壬午軍亂)이었다. 1881년 신식군대로서 신설된 별기군의 창설과 더불어 종래 5군영으로 편제되었던 조선의 군영은 무위영(武衛營)와 장어영(壯禦營)의 2영으로 통합․축소되었다. 갑신정변으로 인하여 고종의 권위는 더욱 추락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1894년 이래 일련의 사건들과 왕권의 축소

1894년에 벌어진 동학농민운동은 향후 한국사의 향방을 결정하는 일련의 사건의 도화선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자신의 지지기반을 구축하며 군주 중심의 개화정책을 추진하던 고종 역시 커다란 변화와 시련을 겪게 되었다. 1894년 1월 초 고부군수(古阜郡守) 조병갑(趙秉甲)의 탐학과 횡포가 계기가 되어 전봉준(全琫準)을 중심으로 동학 농민의 봉기가 시작되었다. 농민군의 기세는 높았으며, 그 진압을 위해 청과 일본의 군대가 파병되었다. 농민군은 근대 화기로 무장된 일본군을 당해낼 수는 없었으며, 결국 10월 22일 우금치 전투에서의 패배함으로써 동학농민전쟁은 실패를 고하였다. 한편 조선에 파병된 직후 일본군은 궁중에 난입하여 조선의 내정개혁을 요구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아관파천과 대한제국의 성립

러시아 공사 웨베르(Waeber)를 친견하는 한편 친일 성향의 박영효에게 왕후 시해를 계획했다는 죄를 씌워 면직 시키는 한편 박정양(朴定陽)과 같은 친미․친러적 성향의 인물들을 기용하여 일본을 견제하였다. 이에 위기감을 느낀 일본은 낭인을 파견, 1895년 8월 20일 궁에 침입하여 왕후를 시해 하였으며(을미사변), 고종은 일본군에 의해 마치 포로처럼 감금되었다. 사변 직후 김홍집 내각은 고종의 국정 간여를 배제하며, 태양력을 사용하고 단발령(斷髮令)을 실시 하는 등의 개혁을 추진하였지만 을미사변 이후 반일적인 사회분위기를 더욱 악화시킬 뿐이었다. 환어 이후 고종은 새로운 연호를 ‘광무(光武)’로 할 것을 명 하는 한편 원구단(圜丘壇)을 축조하고, 국호를 대한제국(大韓帝國)으로 결정함과 아울러 10월 12일 황제로서 즉위하였다. 대한제국은 대한국국제(大韓國國制)에서 살펴볼 수 있듯이 황제가 만기(萬機: 임금이 보는 여러 가지 정무)를 총람하는 전제황권국가였다. 이와 같이 대한제국 설립 이후 고종이 추진한 일련의 개화정책은 광무개혁(光武改革)이라고 통칭되는데, 대한제국과 광무개혁에 대한 평가는 극단적으로 양분되어 있다. 고종을 근대적 개명군주로 평가하며 광무개혁은 고종이 추진한 근대화 개혁으로 대한제국은 우리 역사 최초로 근대 국가를 지향했다는 평가와 고종이 추진한 전제황권의 강화는 시대에 역행하는 것일 뿐만이 아니라 근대적 개명군주, 근대 국가를 지향했다고 하기에 당시 새로운 정치사상이나 이념이 제시되지 못했다는 평가가 그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망국과 승하

대한제국의 성립과 황제 즉위는 상황에 의지한 측면이 강했다. 즉 고종과 조선이 강력하여 이룬 것이라기보다는 외세간, 특히 러시아와 일본 사이의 세력 균형 속에서 가능한 것이었으며, 이 세력 균형이 무너짐에 따라 수포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1904년 2월 일본군의 기습으로 시작된 러일전쟁으로 인하여 대한제국과 고종을 지탱하던 세력의 균형추가 무너져 버렸다. 전쟁의 결과 조선에서 일본의 우월권은 국제적으로 보장되었다. 1905년 11월 17일 조선의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는 을사늑약이 체결되어 대한제국은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하였다. 이에 고종은 을사늑약의 불법성을 호소하기 위하여 1907년 6월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개최되는 제2차 만국평화회의에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 3인을 특사로서 파견하였다.(헤이그특사 사건) 그러나 안타깝게도 각국의 정부는 이미 을사늑약을 승인했기 때문에 대한제국의 독자적인 외교행위를 인정할 수 없다는 이유로 이들의 회의 참석은 좌절되었다. 고종 퇴위 직후인 1907년 7월 24일 일본은 소위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 또는 정미7조약丁未七條約)을 강제, 대한제국 정부의 각 부처의 차관을 일본인으로 임명케 하여 국정 전반을 간섭함은 물론 재정부족을 이유로 대한제국의 군대를 강제로 해산시키는 등 강점(強占)을 위한 준비를 착착 진행하였다. 결국 1910년 8월 22일 한일합병조약(韓日合拼條約)이 체결되었으며, 일본은 대한제국의 이름을 조선으로, 고종을 이태왕(李太王)으로 변경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