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명성황후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명성황후

閔妃
조선 후기왕비
시대조선 후기
직군왕비
양력 생일1851년 11월 17일
향년43세
Birth Color
폼페이안 레드 (Pompeian Red)
#A74145
Second Color
오키드 핑크 (オーキッドピンク, Orchid Pink)
#DA81B2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7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7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후기 제26대 고종의 왕비.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Lunar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음력 생일9월 25일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전갈자리
별자리 주간전갈자리Ⅲ: 매력의 주간
탄생성명왕성
탄생신하데스
Terrestrial

땅

탄생화머위
꽃말이른 회복 · 넓은 보호 · 뿌리의 생명력 · 조용한 시작
탄생목밤나무
탄생석토파즈
Spirit

그 외

탄생주스팅거
탄생색 (영문판)폼페이안 레드 (Pompeian Red)
탄생색 (일어판)오키드 핑크 (オーキッドピンク, Orchid Pink)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BIRTHDAY PEOPLE

생일 인물

BIRTHDAY HISTORICAL FIGURES

생일 역사 인물

Explore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평가가 엇갈리는 명성황후

명성황후(明成皇后)처럼 양 극단의 평판을 가진 사람도 없다. 황현(黃玹)은 『매천야록(梅泉野錄)』에서 명성황후에 대해서 ‘씀씀이에 도무지 절도가 없어서 흥선대원군이 10년 동안 쌓아둔 돈이 모두 동이 났고 이로부터 매관매직의 폐단이 시작되었다’고 매우 비판적으로 서술하고 있다. 명성황후의 씀씀이에 대한 『매천야록(梅泉野錄)』의 기사이다. 이 기사에 따르면 명성황후는 원자가 탄생한 후 팔도의 명산에 기도를 드리기 위해 많은 돈을 쓴 것으로 되어 있다. 고종도 연회를 즐겨 돈을 많이 썼다고 한다. 이에 비해서 일찍이 조선을 방문하여 명성황후를 직접 만난 바 있는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Isabella Bird Bishop)은 그의 저서 『조선과 그 이웃나라들』(Korea and Her Neighbors)에서 그녀에 대해 ‘대화 내용에 흥미를 가지게 되면 눈부신 지성미로 얼굴이 빛나는 지식인이자 우아한 자태를 가진 귀부인’으로 묘사하고 있다. 명성황후는 생존했던 당시에도 이렇게 엇갈리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명성황후의 진정한 모습은 그 사이 어디쯤에 있을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민비(閔妃)’라고 불린 이유

명성황후는 1851년 9월 25일 여주(驪州) 근동면(近東面) 섬낙리(蟾樂里) 사제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여흥(驪興)이다. 아버지는 민치록(閔致祿)이며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생부인 민유중(閔維重)의 후손이다. 1866년 16세의 나이로 왕비에 간택되어 운현궁에서 고종과 가례를 올렸다. 명성황후라는 호칭은 그녀가 죽은 뒤 대한제국 시기에 붙여진 것이다. 황후란 황제의 부인이란 뜻이다. 그녀가 살아있을 때 황후가 아니었으니 명성황후란 호칭도 있을 수 없었다. 과거 명성황후 대신 널리 쓰인 호칭으로 민비(閔妃)를 들 수 있다. 민씨(閔氏)의 성을 가진 왕비라는 뜻이다. 『매천야록』을 비롯하여 명성황후가 생존했을 때의 자료들을 살펴보아도 민비란 용어는 등장하지 않는다. 이 기사는 이왕전하(순종)가 민비전하(명성황후)의 제사를 지내기 위해 출궁하여 경효전에서 성대한 제례를 행했다고 보도하고 있다. 그런데 이로부터 10년 뒤에 민비는 다시 명성황후가 되었다. 1920년 7월 10일자 『매일신보』는 돌아가신 이태왕 전하의 존호를 고종태황제로 올리면서 민비전하의 호칭도 명성황후로 승격시키기로 일본 궁내성이 내정했다고 보도하였다. 고종과 명성황후의 존호를 올리는 문제에 관한 『매일신보』의 기사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일제는 명칭을 민비로 격하하였다가 명성황후로 원위치 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

명성황후는 1873년 고종이 직접 나라의 정사를 돌보는 친정(親政)을 시작한 후 자신의 친정붙이들과 함께 막강한 정치권력을 행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그녀의 친족을 민씨 척족(戚族)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들의 권력을 과거 안동 김씨(安東金氏)의 세도권력에 비겨서 여흥 민씨(驪興閔氏) 세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심지어는 그녀가 남편인 고종을 제치고 국정을 주도한 것처럼 이야기하기도 한다. 여흥 민씨들이 출세하여 고관대작을 독차지한 점을 보면 과거 안동 김씨 때와 비슷한 점이 적지 않다. 하지만 다른 점도 있다. 하지만 명성황후가 개인적으로 국정에 상당부분 관여했던 것은 사실로 보인다. 명성황후도 이러한 희생양으로 이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야사에 나타나는 명성황후의 정치적 위상은 얼마간 과장되어 있었을 가능성이 적지 않다. 이러한 점을 모두 고려한다면 명성황후는 고종을 제치고 국정을 주도했다기보다는 고종의 정치적 참모이자 동반자였던 것으로 보는 것이 온당할 것이다. 고종 스스로도 주요한 정치적 사안마다 명성황후의 의견을 청취했음을 밝힌 바 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흥선대원군과의 운명적 대결

명성황후의 일생을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흥선대원군이다. 그녀의 일생은 생애의 마지막 순간까지 시아버지인 흥선대원군과의 대결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녀와 흥선대원군이 직접 충돌한 큰 사건을 추리면 임오군란(壬午軍亂), 갑오개혁, 을미사변을 들 수 있다. 1882년에 일어난 임오군란은 군인들이 일으킨 폭동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군인들이 운현궁에 방문하고 난 뒤 더욱 행동이 과격해졌다. 군인들은 궁궐을 습격하고 왕비를 해치려고 하였다. 당시 흥선대원군이 심복으로 하여금 군복으로 갈아입고 군중들을 이끌도록 하였다고 한다. 당시 명성황후는 무예별감 홍재희(洪在羲)의 등에 업혀 궁궐을 탈출하였으며 임오군란에 관한 『고종시대사』의 기사이다. 청군의 개입으로 흥선대원군의 재집권 시도는 물거품이 되어 버렸고 피신했던 명성황후는 원래의 자리로 돌아올 수 있었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두 번째 충돌은 1894년에 6월 21일에 있었다. 이때 흥선대원군이 물리력을 직접 장악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해치지는 못했지만 폐비만은 기어코 관철하려 하였다. 명성황후와 흥선대원군의 마지막 대결은 1895년에 있었던 을미사변이었다. 이 사건은 일본 군경과 낭인들이 경복궁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시해한 사건이었다. 명성황후를 해치는 것이 흥선대원군의 뜻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렇게 명성황후는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흥선대원군과 충돌하였다. 유교국가인 조선에서 이러한 진실을 그대로 드러내기 민망하였기 때문에 명성황후를 희생양으로 삼은 것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죽어서 대한제국의 황후가 되다

고종의 정치적 동반자였던 명성황후는 죽어서도 고종에게 도움을 주었다. 을미사변이 초래한 거족적인 분노는 고종이 일본의 감시망에서 탈출하는 데 큰 보탬이 되었다.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시행되자 위정척사사상을 가진 지방 유생들이 봉기하였다(을미의병). 이들은 ‘원수를 갚고 형체를 보존한다(復讐保形)’라는 것을 명분으로 내걸었다. 이들 지방 유생들은 과거 명성황후에 대해 비판적이었지만 을미사변이 이들의 마음을 돌아서게 한 것이다. 지방에서 유생들이 봉기하자 개화파 정부는 군대를 지방으로 파견할 수밖에 없었다. 고종은 이러한 틈을 노려 궁궐에서의 탈출 즉 아관파천을 감행하였다. 명성황후의 국장(國葬)도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 회복에 큰 도움을 주었다. 1896년 2월 아관파천으로 고종이 국정 주도권을 되찾았지만 명성황후의 국장은 곧바로 실시되지 못했다. 명성황후를 직접 시해한 일본 낭인은 둘째 치고 을미사변에 관여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유길준(兪吉濬) 등이 일본에 망명해 있는 상태였다. 결국 1897년 10월 13일 대한제국이 선포되었으며 그 한 달 여가 지난 11월 22일 명성황후의 국장이 종결되었다. 결국 명성황후의 국장은 대한제국의 선포로 귀결되는 고종의 정치적 주도권 재확립과정과 맞물려 진행되었던 것이다. 시호는 1897년 3월 2일 이미 명성(明成)으로 지어놓은 상태였으므로 책봉과 동시에 명성황후가 되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