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샤모이스 Chamois
생일 인물
생일 역사 인물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충남 예산(禮山) 사람이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1932년 이른 봄부터 그는 상해의 홍구(虹口) 일대에서 야채장사를 하며 일본군관계의 정보를 탐지하던 중 박 진의 소개로 임시정부 국무위원 겸 한인교포단장(韓人僑胞團長)인 백범(白凡) 김 구(金九)를 만나게 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하지만 이봉창의 의거는 중국내의 동포들과 독립운동계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계기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전세계에 한민족의 독립투쟁에 대한 열기가 식지 않았음을 입증해 주게 되었다. 또한 윤봉길에게는 일제(日帝)에 대해 새로운 투쟁의 결의를 다지는 커다란 자극제가 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그는 김 구를 비롯한 다수의 독립운동 지도자들과 함께 독립운동의 방략을 토론하고 의열투쟁의 기회를 열망하는 상태에서 1932년 4월 29일을 맞이하게 되었다. 상해사변으로 상해에 진주한 일본군은 4월 29일 일왕(日王)의 생일인 천장절(天長節)을 일본군의 상해 점령 전승경축식과 합동으로 상해의 홍구공원(虹口公園)에서 거행할 예정이며, 상해에 있는 일본 거류민은 도시락과 수통, 그리고 입장권만을 휴대하고 참가하라는 보도를 상해일일신문(上海日日新聞)에 보도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살신구국의 결심을 한 그는 의거 4일 전인 1932년 4월 26일 한인애국단에 단원자격으로 김 구 단장 앞에서, "나는 적성(赤誠)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하여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중국을 침략하는 적의 장교를 도륙(屠戮)하기로 맹세하나이다"라는 비장한 선서를 하고 최후의 준비를 서둘렀다. 그리하여 4월 27일과 28일에는 홍구공원에 가서 현지를 면밀히 조사하여 거사에 만전을 기하였고, 특히 28일에는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그곳에 머물러 준비하는 축하식장의 팻말을 보고 도륙의 대상인 일본군 사령관 시라가와(白川義則) 대장과 해군 함대 사령관 노무라(野村吉三郞)의 설자리와 그 주위에 모일 인물들까지 파악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그리하여 4월 29일 일찍 한 교포 집에서 한인애국단의 김 구 단장과 함께 아침 식사를 하고,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 1개와 도시락으로 위장된 폭탄 1개를 김 구 단장으로부터 받아 어깨에 메고 손에 들었다. 이 준비된 폭탄은 김 구 단장의 요청으로 중국 상해 병공창(兵工廠) 창장 송식표(宋式·)가 기사(技師) 왕백수(王伯修)를 시켜 비밀리에 제조한 것으로, 병공창의 병기주임(兵器主任)이었던 김홍일(金弘壹)장군의 주선으로 김 구-윤봉길로 전달된 것이었다. 그리고 그는 홍구공원으로 출발하기 전에, 자신이 가진 새 시계를 김 구 단장의 헌 것과 바꾸어 갖고 의거 준비금으로 받은 돈의 나머지를 김 구 단장에게 돌려주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오전 7시 50분경, 그는 공원 안으로 들어가 미리 작정해 두었던 지점에 이르러 투척할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당시 홍구공원에는 수만의 인파가 운집하였고, 중앙의 식단(式壇)을 중심으로 하여 그 전면에는 일본 관민이 정연히 도열하였고, 그 앞에 일본 학생이 도열해 있었다. 그리고 그 좌우에는 일본 육·해군의 군대가 호위할 뿐 아니라, 그 뒤 수미터의 간격을 두고 경비원이 이중 삼중으로 경계하고 그뒤엔 일반 군중이 모여 있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드디어 11시 40분경, 운명의 시각이 되자 그는 도시락으로 된 폭탄을 땅에 놓고, 어깨에 걸매고 있던 수통으로 위장된 폭탄의 덮개를 벗겨 가죽끈이 붙은 그대로 오른손에 쥐고 왼손으로 안전핀을 빼면서 앞사람을 헤치고 2미터 가량 전진하여 단상위로 투척하였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25세의 나이로 이국(異國) 땅에서 순국한 그의 유해는 1946년 일본에서 박 열(朴烈)·이강훈(李康勳)의 주선으로 본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다.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서훈
정본 서훈 기록입니다.
- 대한민국장 · 1962년
출처 · 국가보훈부 독립유공자 공훈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