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rthDB · 날짜 기반 엔터테인먼트 아카이브FRI · 26.10.16 · KST
BirthDB· THE DATE ARCHIVE
Section탄생상징
Page조선 태종 탄생 정보와 업적
Historical Figure

조선 태종

太宗
조선 전기문신국왕
시대조선 전기
직군문신 · 국왕
양력 생일1367년 6월 21일
향년54세
Birth Color
샤모이스 (Chamois)
#F6B066
Second Color
금차 (金茶)
#F39800
인생 여정 수 · Life Path Number
8
삶의 큰 방향을 상징하는 수
탄생수 · Birth Number
8
그 날짜가 품은 수
Summary

인물 요약

조선의 제3대(재위: 1400년~1418년) 왕.

출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 전문사전 학술 콘텐츠

Birth Profile

탄생 정보

같은 양력 월일의 탄생색과 날짜 상징을 이어서 봅니다.

같은 생일 보기
Lunar

음력 생일

정본 기록에 남은 음력 생일입니다.

음력 생일5월 16일
Birth Symbols

탄생 상징

하늘·땅의 날짜 상징 정보입니다.

Celestial

하늘

별자리쌍둥이자리
별자리 주간쌍둥이-게자리: 마법의 주간
탄생성수성
탄생신헤르메스
Terrestrial

땅

탄생화달맞이꽃
꽃말기다림 · 밤의 희망 · 말없는 사랑 · 자유로운 마음
탄생목무화과나무
Spirit

그 외

탄생주보드카 마티니
탄생색 (영문판)샤모이스 (Chamois)
탄생색 (일어판)금차 (金茶)
Signature Spectrum

탄생색 스펙트럼

영문판·일어판 탄생색과 비슷한 색상의 탄생색을 스펙트럼·날짜 링크로 잇습니다.

BIRTHDAY PEOPLE

생일 인물

BIRTHDAY HISTORICAL FIGURES

생일 역사 인물

Explore

같은 날짜·상징

현대 인물 페이지와 같이 같은 생일과 탄생 상징으로 이어 봅니다.

Record

업적과 활동

공개된 정본 기록에서 확인한 활동입니다.

조선 개국에 주도적으로 참여하다

조선 개국 전까지 태종의 역할은 지대하였다. 1388년(창왕 1) 태종은 이색(李穡)을 따라 서장관으로 명(明)에 다녀왔다. 당시 이성계를 중심으로 정도전 등 훗날 조선을 개국하는 세력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이색은 명에서 고려를 감국(監國)해 줄 것과 창왕(昌王)의 입조를 청하기 위해 이숭인(李崇仁), 김사안(金士安) 등과 명에 가게 되었다. 이색은 자신이 사신으로 고려를 떠난 사이에 정변이 일어날 것을 걱정하여 태조의 아들을 함께 데려가길 청하였고 이때 23세인 태종이 함께 하게 된 것이다. 사행에서 돌아오는 길에는 발해(渤海)에서 풍랑을 만났으나 태종은 매우 태연자약했다고 전한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개국 후의 위기부터 제1차 왕자의 난까지

조선이 개국된 후 태종은 정안군(靖安君)에 책봉되었다. 새로운 왕조의 개창에 지대한 공을 세웠지만, 새로운 권력 구조에서는 배제되었다. 왕실과 종친을 배제하는 속에서 군권에서도 제외되고 개국공신(開國功臣)에도 책립될 수 없었다. 또한 세자로 책봉되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1394년(태조 3) 명에서 왕자를 입조시키라고 하자, 태종이 사신으로 떠났다. 명은 조선이 여진인들을 유인하여 요동을 침범하려 한다는 의문을 품고, 조선 사신을 요동에서 저지하고 맞아들이지 않았다. 태종은 이때 사신으로 가 남경에서 직접 홍무제를 만나 명의 의구심을 풀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제2차 왕자의 난을 거쳐 왕위에 즉위하다

1399년(정종 1)에는 조례상정도감을 설치하였는데, 태종이 조례상정도감판사(條例詳定都監判事)가 되었다. 또한 강원도와 동북면의 군사를 나누어 맡고 다른 형제들과 종친, 조영무, 조온(趙溫) 등 자신의 세력 일부에게만 군권을 집중시켰다. 정종[조선](定宗)은 자식이 많기는 하였으나, 적처 소생의 아들이 없었다. 조박의 친척인 불노(佛奴)를 원자로 하여 궐 안에 들이기는 하였으나, 결국 이듬해인 1400년(정종 2) 초 제2차 왕자의 난이 일어나고 태종이 세자로 책봉된다. 제2차 왕자의 난은 왕위 계승을 노린 회안군 방간과 태종 사이의 대결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조공-책봉 관계의 성립

조선 건국 후 가장 중요하면서도 어려웠던 문제 중 하나는 바로 명과 관계를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태조대에는 조선이 요동을 침공할지 모른다는 명의 의구심을 기본으로 표전문 문제 등 여러 사안으로 인하여 명과 관계가 안정되지 못하였다. 그러나 태종은 즉위 이후 1401년(태종 1)에 건문제(建文帝)로부터 국왕으로 책봉 받는 고명과 인신을 받았으며, 영락제가 건문제를 몰아낸 후에는 영락제로부터 다시 책봉을 받았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관제의 정비

태종은 즉위 전 관제 개정을 통해 도평의사사를 폐지하고 의정부를 설립한 데 이어, 1401년(태종 1)에는 문하부(門下府)를 혁파하여 이를 의정부에 귀속시키고, 그 때까지 의정부합좌에 참여했던 삼사·예문춘추관(藝文春秋館)·삼군총제를 제외하였다. 이로써 의정부 구성원으로만 최고 국정을 합의하게 하였다. 한편 간쟁을 관장하던 문하부낭사(門下府郎舍)는 사간원(司諫院)으로 독립시켰다. 삼사와 삼군부는 사평부(司平府)와 승추부(承樞府)로 개정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한성 재건설 – 창덕궁과 준천, 시전 행랑

정종은 즉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개성으로 되돌아갔다. 태종은 즉위 후 부왕인 태조와 관계를 개선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를 위한 가장 큰 당면과제로 대두된 것이 한양으로 재천도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태종대에도 한양 재천도는 쉽지 않아서 4년여의 진통 기간을 거쳤고, 최종적으로 1404년(태종 4) 천도를 결정하고 1405년(태종 5) 이를 실행하였다. 천도를 결정한 후 태종은 경복궁에 들어가지 않고 이궁을 건설하고 이곳에 입어하였는데, 이곳이 바로 창덕궁(昌德宮)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불교계를 정비하고 오례의 기틀을 마련하다

1405년(태종 5) 한양 천도 후 대대적인 불교 개혁에 착수하였다. 국가가 지정한 사원 이외의 사원전(寺院田)과 노비를 환수하여 국가에 귀속시킨 것이다. 당시 11종 242사만 공인하고 사원전 3,4만 결과 노비 8만 명이 몰수되었다. 이는 전체 사원전과 노비 규모의 약 8할을 국고로 귀속시킨 것이었다. 2년 후에는 7개로 종파를 축소하였으며, 왕릉 옆에 사찰을 두는 능사 제도도 혁파하였다. 또한 1415년(태종 15)에는 고려 이래 유구한 역사를 지니고 있었던 상원 연등회(燃燈會)를 폐지하였다. 불교계를 정비하는 것과 동시에 전국의 향교(鄕校)를 강화하는 조처를 내렸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양전과 토지제도의 개편

태종대에는 양전사업을 통해 국가적으로 세금을 거두어드릴 토지를 확보하였다. 1405년(태종 5)부터 이듬해까지는 6도를, 1411년(태종 11)부터 1413년(태종 13)에는 평안·함경도까지 양전을 시행해 모두 120만여 결 이상의 전지를 확보하였다. 이는 고려 말 왜구 침입 등으로 인해 연해 지역이 전황지여서 충분히 파악하지 못했던 것에서 매우 늘어난 양이었다. 또한 면세전을 축소하고 과전의 결수를 줄임으로써 세금을 거두어들일 토지를 확대하였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숙청과 왕권 강화, 그리고 세자 교체

태종은 즉위 과정에서 경쟁상대가 될 인물들을 이미 제거한 데다가 즉위 이후에도 외척, 종친, 공신세력들을 차례차례 제거하였다. 1404년(태종 4) 가장 먼저 제거 대상이 된 것은 이거이(李居易) 부자였다. 이거이는 태조와 태종의 사돈이었으나, 3년 전 사병 혁파를 놓고 불만을 드러냈다는 이유로 이거이와 이저(李佇) 부자를 귀향시켰다. 1407년(태종 7)에는 그의 처남으로 권세를 부리던 민무구(閔無咎)·민무질(閔無疾) 형제를 사사하였다. 1406년(태종 6) 세자에게 선위할 의사를 표시했을 때 이들이 세자를 끼고 집권을 시도했다는 명목이었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태종의 자손, 죽음 이후

태종은 아들 12명과 딸 17을 두었는데, 그중 원경왕후 민씨와 사이에서 아들 넷과 딸 넷을 두었다. 아들은 첫째부터 양녕대군, 효령대군(孝寧大君), 세종(世宗), 성녕대군(誠寧大君)으로서 후사는 셋째인 충녕대군, 곧 세종(世宗)이었다. 딸은 정순공주(貞順公主), 경정공주(慶貞公主), 경안공주(慶安公主), 정선공주(貞善公主)다. 1418년(태종 18) 세종에게 양위하면서 성덕신공상왕(聖德神功上王)의 존호를 받았으며, 1421년(세종 3)에는 성덕신공태상왕으로 가봉(加封)되었다. 시호는 공정예철성렬성덕신공문무광효대왕(恭定睿哲成烈聖德神功文武光孝大王)이며, 묘호(廟號)는 태종이다.

출처 · 국사편찬위원회 우리역사넷 한국사연대기

Reading · 자료와 맥락

기록을 읽는 기준

출생 정보는 기록에 확인된 정밀도로 표시합니다. 양력과 음력을 구분하고, 날짜가 완전하게 확인된 경우에만 탄생 상징을 함께 살펴봅니다.

인물 요약과 활동 기록의 출처는 각 문단 및 출처 목록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